본문 바로가기
온갖 리뷰

『선창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양경인

by YH51 2022. 6. 14.

 가끔 기자 없는 기자회견에 참석할 때면 그런 생각을 한다. ‘지금 이 자리를 위한 노력과 여기서 말하는 것은 어딘가에 기록되지 않고 바로 휘발되어 사라지겠구나.’ 사실 기록이라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그래왔다. 과거에는 글자를 쓸 수 있는 자들이 모든 것을 전유했다. 이는 현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양상만 조금 달라졌을 뿐, 각 미디어의 입장에 따라, 혹은 누군가의 입김에 따라 어떤 것은 기록되고, 어떤 것은 그대로 사라진다. 이것은 ‘사실’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기록된 역사의 허점이기도 하다.

 구술의 매력은 이러한 구도를 흔들 수 있다는 것에 있다. 화자 개개인은 구술을 통해 자신의 기억과 언어로서 살아온 시대를 증언한다. 이러한 증언에는 자격이 필요하지 않다. 누구나 자신이 본 것, 느낀 것 등을 자신의 언어로 직접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구술이 모이면 주류적 미디어나 권력자들이 애써 무시하려 했던 것들이 다시 등장할 가능성이 발생한다. 누군가에 의하여 잊혀진 시간, 선택받지 못한 순간을 다시 호명하여 ‘그들만의 역사’에서 ‘우리의 역사’로의 재구성을 추동한다.

 《선창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에서는 엄혹한 시대에 다른 세상을 바랐다는 이유로 장기수로 살아야 했던 ‘김진억’이라는 ‘여성운동가’의 삶을 담아냈다. 이 책에서는 한국 현대사에서 있었던 굵직했던 사건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다. 대신 짧았던 4·3 항쟁기, 그리고 그 이후의 긴 감옥 생활에서 ‘그녀’가 겪었어야 했던 일과 자신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고뇌하던 모습들을 구술을 통해 복원했다. 각종 선택의 기로에서 김진억이라는 ‘사람’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리고 그 선택의 이유는 무엇인지를 덤덤하게 다룬다.(틈틈이 등장하는 남성들에 대한 인상평이 다소 흥미롭다.)

 그녀의 삶 못지않게 인상 깊은 것은 이 책의 저자와 여성운동사를 연구했던 연구자들의 시선이다. 이 책의 표현들을 보면, 기록되지 못하여 ‘공백’이었던 여성운동사를 복원하면서 그것이 새로운 역사의 단서가 되기를 바랐던 마음의 절실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구술자의 한마디, 한마디에서 의미들을 찾아내어 그것을 문장으로 벼려내며, 여성운동가의 존재에 관하여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해왔을지를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다.

 저자인 양정인 선생은 여성운동가 김진억의 삶을 ‘몸으로 시대를 밀고 나간 활동가’라고 표현한다. 엄혹한 시대 상황이 주는 무게, 특히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감당해야 하는 추가적인 무게추를 지고도 그녀는 꿋꿋하게 시대를 밀고 나갔다. 

 선창자의 ‘메기는 소리’가 있기에 후창의 ‘받는 소리’가 따라온다. 받는 소리의 박자라도 따라잡기 위해 선창자의 지나온 길을 다시 한번 쫓아가 본다. ‘선창’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 이 글은 "다른 세상을 꿈꾸는 밥차 '밥통'" 웹진 94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