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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어쩌구

3월 단상

by 비내리는날 2022. 3. 11.

 지난 주 주말에 어쩌다 알게 된 운동권 친구와 연극을 보러 갔다. <라스트 세션>이라고 작년에 '오징어 게임'으로 유명세를 타셨던 오영수 배우께서 나와 많이 홍보된 연극이었다. 내용을 짧게 요약하자면, 1939년 유럽이 전운에 쌓인 시기 구강암으로 죽어가던 노년의 프로이트와 젊은 기독교 변증가 C.S.루이스가 만나 신존재에 대한 격론을 벌이는 내용이었다. 사실 이 연극은 이미 이 친구와 한 달 전에 신구씨가 프로이트 역으로 나오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보고 나오는 길에 우리는 지난번과는 다른 감상을 공유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전간기의 유럽의 상황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와 너무 유사하다는 얘기를 했다. 지난번에는 신존재에 관한 둘의 의견에 대해 얘기했다면, 이번에는 혐오, 전쟁, 극우주의, 정신적 공백에 대해 이야기했다. 물론 전간기 유럽과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같지 않다. 이미 한 번 겪어본 일을 그대로 다시 반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다. 그때보다 우생학, 인종주의, 권위주의, 파시즘, 전쟁의 위험성은 훨씬 심각하게 인식되고 있다. 전면적인 전쟁은 핵무기로 인해 리스크가 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세계적 인종주의의 확산과 권위주의의 부활, 신종 파시스트들, 중심부로 다가오는 전쟁을 목격하고 있다. 당장 한반도에서는 중국과 조선족, 북한에 대한 인종주의에 기반한 혐오가 넘쳐나고 있다. 일부 정치세력들은 이런 혐오감정을 활용하려고 하고 있다. 낮은 출생률과 성별임금격차 속에서 다시 여성을 가정으로 집어넣고 인구재생산 중심의 정책을 펼치려는 자들이 정권을 잡았다. 겨우 가시화된 성적 소수자들은 이런 백래쉬를 방해하는 존재들일 뿐이다. 그들은 '특구'로 들어가지던지, 탄압받아야 한다. 반공이라는 가시적인 목표를 상실한 보수 개신교는 노골적으로 이들을 적대시하면서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하고 있다. 이미 최종단계에 접어든 북의 핵개발은 우리에게 전쟁이냐 평화냐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미중패권경쟁의 구도 아래서 우리의 자율적 선택지는 많지 않다. 여기에 저항할 역량을 가진 시민사회의 운명은 다소 암울해보인다. 회오리치듯이 중앙정치로 상승하는 구조 속에서 빨려들어가거나 고립 속에서 힘겹게 싸우는 사람들만이 보인다. 학생운동은 코로나로 인해 재생산이 불가능해졌다.

 

 연극 속의 프로이트는 거대한 악의 존재가 오히려 선을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게 하려는 신의 뜻이라는 루이스의 의견에 냉소한다. 확실히 우리는 홀로코스트 이후를 살아가면서 악이 선한 것을 선택하게 하려는 신의 의지라는 무책임한 말로 설명할 수는 없다. 프로이트는 신에 대한 믿음을 철들지 않은 어린아이 같은 것이라며 일갈한다. 루이스는 프로이트가 자신의 이성의 범주 내에서 설명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며 지적한다. 이런 시대에 프로이트의 냉소가 루이스의 낙관보다 더 가깝게 느껴진다. 그러나 연극 말미에 프로이트는 "가장 어리석은 것은 생각하기를 멈추는 것"이라고 말한다. 전간기로부터 100년이 채 안되는 기간동안 우리는 얼마나 배웠고 무엇을 생각했을까. 나는 프로이트의 말에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가장 어리석은 것은 생각하기와 실천하기를 멈추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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