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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어쩌구

백기완 선생님, 아주 낯선 당신을 기리며

by 비내리는날 2021. 2. 19.

 최근에 아프시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 누워만 계신다고 들었다. 전에는 집회에 가서 선생님이 앉아계시는 모습을 종종 보곤 했다. 2017년에 군입대를 하고부터는 실제로 뵌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돌아가셨다고 하니 왠지 모를 섭섭함을 느낀다. 자리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 없는 기분이다. 실은 선생님과 나의 삶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나는 문민정부 아래서 태어나 민주적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이다. 물론 민주주의가 민주주의 답지 못한 시기도 보냈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기대와 함께 왠지 모를 허무감이나 세상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자랐다. 선생님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전쟁을 겪고 세 번의 독재체제에 저항해왔고 온갖 투쟁에 함께해오셨다. 선생님의 속까지 내가 알길은 없지만, 겉에서 보기에는 뼛속까지 투사로 보였다. 선생님에게는 평생 저항해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조국을 찢어놓은 세력들, 외세, 군부, 자본가 등등... 나에게는 선생님이 평생 저항해야 했던 것들이 너무 공허하게 느껴졌다. 조국이 찢긴 것은 너무 당연한 일상이었고, 외세는 이제 세련된 문화의 치장을 했다. 군부는 제자리로 돌아갔으며, 자본과는 싸울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선생님과 나는 아주 낯선 사이였다.

 그러나 그런 낯섦이, 나에게는 왜 그분이 그렇게 평생을 다 바쳐 싸웠으며, 싸우고 있는지 생각하게 했다. 선생님의 몸짓은 물결처럼 흐르는 일상 밑의 추악함을 단호히 드러나게 하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장례식장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눈깔을 똑바로 뜨고 앞으로 앞으로" 추상같은 그 말씀이 당연함으로 위장한 권력을 드러냈다. 똑바로 눈을 뜨지 못하면, 너도 나도 일하고 너도 나도 잘사는 '노나메기' 세상은 영영 오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부동산 이익을, 주식을, 노동착취를, 성별권력을, 외세를, 전쟁위기를 흐린 눈으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선생님은 일평생을 눈을 똑바로 뜨고 사셨기에, 그것들과 일생을 걸고 투쟁해왔다. 이제는 우리가 눈을 똑바로 뜨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때이다. 그 앞길이 얼마나 흐리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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