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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글쓰기

울타리치기: 자본주의 사회의 차별적 생활세계

by 비내리는날 2021. 11. 9.

 언젠가 한 친구와 함께 대학로에 있는 모 식당을 찾아간 적이 있다. 우리는 밥을 맛있게 먹고 난 후에 즐겁게 헤어졌다. 다음에도 다시 그 식당을 가자는 말을 하면서. 그리고 며칠 후, 우연히 온라인에서 그 식당이 노키즈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식당 내부나 문에는 그런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온라인에는 노키즈존이라고 적어놓았던 것이다. 이런 식당이나 카페는 이제 주변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유는 아이들이 시끄럽게 굴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비슷한 배제의 모습을 일상생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 아파트 단지를 보자. 이 단지는 높은 담으로 둘러쳐져 있다. 외부의 아이들은 이 단지의 놀이터를 이용할 수 없다. 최단거리로 이동하려는 보행자도 이 단지를 횡단할 수 없다. 택배기사는 지하화한 주차장에 들어갈 수 없다. 배달기사 역시 오토바이를 단지 내로 들일 수 없다. 단지 내의 주민들은 소유주끼리의 모임을 가지며 '아파트의 가치'를 지켜나가자고 말한다. 이 두 에피소드에는 동일하게 흐르는 하나의 논리가 있다. 내가 이 공간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는 전적인 독점권을 가지고 있다는 논리 말이다. 그렇지만 이 논리 자체는 낯선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 탄생과 함께 나타난 '울타리치기'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울타리치기는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있어서 중요한 과정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영국의 인클로저였다. 마르크스가 『자본』1권에서 묘사했듯이, 공유지는 오랜 세월에 거쳐서 대농민과 토지귀족들에 의해 사유화되었고 거기에 거주하던 소토지소유자나 농업노동자들은 그들의 오두막에서 쫒겨나 도시의 산업예비군이 되었다. 마르크스는 이미 청년시절에 사유지에서 마른 나무가지를 줍는 사람을 가혹하게 처벌하는 삼림도벌법의 제정에 대해 공통의 것인 자연을 개인의 사적 소유로 돌리고 그것을 보장해주는 국가와 법을 비판했다. 그 이전 시대에도 개인의 소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자본주의 이행 과정에서 모든 공통의 것은 반드시 누군가의 사적인 소유물이 되고 울타리치기 되어야 했다. 비단 공간적인 부분에서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부분에서도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 공공장소에 시계가 설치되었고 회중시계를 가진 개인들이 등장했다. 이제 시간은 세분화되고 쪼개져서 효율적으로 관리되고 소유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경향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근대적 개인은 울타리치기 과정을 통해서 탄생했다. 나만의 방이 생기고, 나만의 재산이 생기며, 타자와 내가 명확히 구분되어야만 독자적으로 사고하는 근대적 개인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마르크스가 또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적 본질은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이기 때문에 인간 개체는 독립적으로 사고한다고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개인 간의 매개체로 시장의 교환관계가 점차 사회적 관계를 채워나갔다. 세계적 단위에서는 민족이 국민국가의 구성단위가 되었다. 그리고 시민사회가 등장함에 따라 울타리치기로 분할된 자본주의 사회의 보완과 완충 역할을 해주었다. 그러나 이런 사회는 1차 세계대전과 함께 끝나고, 강력한 사회운동과 경제적 위기의 영향으로 사회적 국가, 사회보장 개념이 현실화되었다. 비록 사유화를 되돌리지도, 공통적인 것을 회복하지도 못했지만, 그러한 제도들은 사회적 연대로서 우리가 서로를 보장해주는 공통의 사회를 살고 있다는 감각을 유지시켜주었다. 그랬던 것이 1970년대 신자유주의 열풍과 세계화로 인해 폐지, 축소되고 지구의 남은 외부들, 공유지들마저 울타리치기하여 모든 공통적인 것을 질식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는 '사회'는 실재하지 않는 비실체가 되고 말았다. 신자유주의의 선구자인 마거릿 대처는 이에 대해 아주 상징적인 말을 남겼다. "사회가 도대체 누굽니까? 그런 건 없습니다(who is society? There is no such thing!)"

 

 이제 울타리치기는 극한으로 진행되고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분할 가능하고 소유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었다. 인간의 감정, 신체 그리고 자연의 모든 것들이 본래의 총체성 속에서 분리되고 판매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시간적으로는 우리는 미래까지 쪼개고 팔게 되었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미래에 경제가 반드시 성장할 것이라는 전제 아래 돌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은행은 이자를 받고, 대출을 해주며, 주식이나 선물거래를 하고, 대출과 할부를 권한다. 노키즈존의 논리 역시 마찬가지다. 내 돈을 들여 만든 가게에서는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배제할 수 있다는 것. 또는 아이가 불편한 소비자들을 위해 배제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내가 소유한 아파트 단지에서 외부인들이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고 소유주들이 정한 원칙에 따르도록 강요하는 것은 더 이상 이상한 것이 아닌 셈이다. 더 이상 사회보장은 공통의 사회를 산다는 감각을 유지시키는 요소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최근 언론에서 중국인을 비롯한 외국인에 대한 의료보험 보장을 '세금도둑'의 관점에서 비춰냈듯이, 사회보장은 하나의 상품이 되고 울타리 밖의 사람인 외국인 수혜자는 '도둑'이 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의 울타리치기가 만들어내는 파편화 속에서 우리는 끝없이 약자를 배제하고 우리 스스로의 존엄과 삶을 파괴할 수밖에 없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로 은마아파트를 보자. 공공재개발을 거부하며 끊임없이 소유자들의 울타리치기를 고수한 결과 개개인의 집 안은 화려할지 모르지만 아파트라는 공간은 낡고 지하에는 쓰레기가 가득차게 되었다. 울타리를 치우고 공통장을 회복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을 회복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간성과 존엄함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것은 사적인 것을 폐지하고 공적인 것의 영역으로 밀어넣는다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피터 라인보우가 지적했듯이 '공통의 연대'는 공적인 것과 동일한 것이 아니며 그 반대말은 '개인의 이기주의'이다. 공통의 공간, 공통의 시간의 복원이 이루어질 때서야 우리는 차별과 배제로부터 벗어날 단단한 토대를 얻게 될 것이다. 시간적 여유는 우리를 강박적인 신경증으로부터 해방시켜줄 것이고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의 회복은 낯선 존재와 공존하는 법을 배우게 해줄 것이다.

 

 이런 공통장의 논리가 낯설게 느껴지고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만 우리 사회를 살펴보면 이러한 논리를 울타리치기의 논리와 긴장감을 유지한 채로 실현하고 있는 사례들을 볼 수 있다. 인류학자 제임스 스콧은 도시의 작은 가게 주인들이 공통적인 것을 제공하는 것을 예시로 설명한다. 물론 이 가게 경영자들은 전형적인 소유자에 속하지만, 동시에 공통장의 논리도 체화하고 있다. 그들은 가게를 운영하면서 친목 네트워크를 유지시키고 동네 커뮤니티를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들은 누구보다 날카롭게 주변의 변화를 살피면서 공공안전에 기여하고 친밀한 관계를 갖는 사람들의 물건을 맡아주거나 화장실이나 기타 시설을 이용하게 해주기도 한다. 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한 커뮤니티에서 오랫동안 장사를 하기 때문에 그 지역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커뮤니티에 대한 이해도가 높기 때문이다. 노키즈존인 대부분의 가게들이 주로 젠트리피케이션이 성행하는 지역에서 타 지역에서 관광오는 젋은 사람들을 타겟으로 노리고 운영된다는 점과 비교하면 공통장의 논리와 울타리치기의 논리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공통장의 사유화가 심화되고 시장의 논리에 따라 빠르게 유동하는 곳에서는 배제가 자리잡는 것이다.

 

 이제는 배제를 배제시키기 위해 울타리를 끊고 우리 삶 속의 공통의 것들을 발견하고 사유화에 맞서 싸우며 공통장에서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나가야 한다. 장벽이 더 높아지기 전에, 배제되는 자들이 더욱 고통받기 전에, 우리 스스로의 인간성을 완전히 상실하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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