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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글쓰기

백신경쟁으로 드러난 낡은 국제질서

by 비내리는날 2020. 12. 17.

 코로나 발발이 어느새 1년이 다 되어가는 가운데, 백신개발 경쟁이 결실을 맺고 있다. 영국의 아스트라제네카, 미국의 모더나, 미-독 합작의 화이자/바이오엔테크, 중국의 시노벡, 러시아의 스푸트니크V가 거의 개발이 완료되었다. 이제 국제사회는 새로운 경쟁으로 들어가고 있다. 바로 백신 확보 경쟁이다. 이미 서구권에서 개발된 백신들은 선진국을 중심으로 백신의 선제확보가 이루어진 상태이다. 유럽연합은 확보량으로는 인구 대비 2배, 미국과 영국은 4배, 캐나다는 6배를 미리 확보해두었다고 한다. 다른 국가들 역시 앞다투어 백신확보에 나서고 있다. 한국 역시 인구 대비 확보량은 부족하지만 인구 대비 선주문량으로 상위소득 16개국 중 12위를 차지했다.

 

 코로나 백신을 둘러싼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드러나는 것은 약육강식, 빈부격차의 국제질서의 민낯이다. WHO에서는 '코벡스 퍼실리티' 프로그램을 통해 백신의 공동구매와 배분을 조정하려 하고 있지만, 이 프로젝트만으로는 빈국 인구 중 20% 정도만이 백신을 접종받을 수 있다. 일부 국가들, 아르헨티나와 멕시코 같은 경우는 자국을 백신 생산기지로 제공하는 대신 백신을 제공받기로 했다. 화이자와 모더나의 mRNA 백신들은 저온보관이 필요하기 때문에 장기수송이 힘들고 배송에 비용이 많이 든다는 점도 문제다. 남미와 아프리카의 국가들은 중국의 시노벡, 러시아의 스푸트니크V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이미 선진국들이 안전성이 확인된 백신을 입도선매한데다가 운송부담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백신 확보를 둘러싼 비판이 거세다. 한국은 왜 더 확보하지 못했는가, 왜 더 좋은 백신을 구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비판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코로나의 종결은 한국 국민들이 백신을 맞는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세계는 이미 초연결 시대이기에 세계의 백신접종과 방역이 끝나야 한국의 방역도 끝날 수 있다. 한국에는 이미 많은 빈국 출신 노동자들이 이민 와있는 현실이고, 또 많은 이들이 오고 떠날 것이다. 물론 정부는 국민의 건강권을 위해 백신을 확보할 책임이 있지만, 국민국가 단위의 책임은 전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세계를 백신을 확보한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로 나눌 뿐이다. 현재의 국제질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지극히 무능하다. 세계 최강대국이라는 미국은 '백신국수주의'를 내세우며 '코벡스 프로젝트' 참여도 거부한 채 자국의 백신물량만 확보하기에 바쁘다.

 나쁜 전망은, 먼저 백신을 확보한 나라들이 접종을 마친 이후 백신을 확보하지 못한 빈국들에 대해 입출국을 제한하는 경우이다. 한편으로, 빈국에서도 부유층과 지도자들은 서구권 국가로 '백신여행'을 떠나는 경우도 상상해볼 수 있다. 한 국가 내에서 혹은 국가 단위로 생물학적 계급이 생긴다는 포스트아포칼립스적 상상은 곧 상상이 아니게 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백신을 무기로 삼아 새로운 국제질서를 형성하려는 시도들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다. 중국은 이미 빈국들에 값싼 백신을 내세워서 영향력을 확보하려 하고 있으며, 러시아도 마찬가지이다.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다.

 

 1차 대전 이후 국제질서는 내실은 어찌되었던 간에, 형식적인 명분을 내세웠다. 전쟁 억제라는 베르사유 체제, 소련의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 미국의 자유주의 질서 등. 국제연합 역시 2차 대전의 교훈으로 국제관계에 어느정도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내실 면에서 이러한 명분들은 자주 국민국가의 이익을 위해 희생되었지만, 패권국가들은 이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냉전의 종결 이후 점차 명분마저 무너지고, 미국, 중국, 러시아 같은 패권국들은 국수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에게 제기되는 문제들, 인공지능, 로봇화, 코로나 팬데믹, 기후변화 같은 주제들은 인류사적 주제들이며 어느 한 국가에게 맡겨질 수 없고 공통의 협력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공통의 이해를 가지지 못한 채 점차 자국의 이해에만 충실해져가고 있다. 이러한 인류사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적 이해를 넘는 '생존을 위한 국제주의'가 다시금 필요해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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