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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적 잡상

징병제라는 틀

by 비내리는날 2018. 11. 28.

 평화의 물결과 함께 한국의 군대 시스템도 느린 변화를 시작한 듯 하다. 국방개혁과 연계된 변화들이 사병인 나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일어나고 있다. 복무기간 단축, 외출 외박 허용, 휴대전화 허용에 관한 계획들, 사병 월급 인상, 급양 개선 등등 많은 변화가 가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으로, 남북평화라는 국제관계의 방향에 따라 훈련 축소가 이루어지고,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대체복무제 실시와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가석방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1차 대전 이후 추진된 총력전 체제의 구축,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분단과 한국전쟁, 그리고 공업화와 박정희식 총동원체제 구축이라는 수십년간의 군사주의적 흐름을 근본부터 변화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이 체제의 기득권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밑으로부터 강한 저항을 받고 있다. 이 체제의 희생자인 군 복무자들, 주로 2030 남성들은 이러한 변화에 거부감과 억울함을 느끼고 있다. 현 정부에 대한 2030 남성들의 지지율은 양심적 병역거부자 판결을 전후해서 크게 떨어졌다. 평화무드나 복무기간 단축 등의 개혁조치에 대해서도 불만이 크다. 물론 전체적인 방향에 대해서, 군대가 지금 상태로는 안되고 더 나아져야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있으나, 자신이 겪은 '군생활'을 부정하는 많은 변화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듯하다. 많은 동년배 남성들이 군가산점제 부활, 여성징병제 실시, 병역'기피'자 엄벌 같은 조치들이 병행될 때에만 형평성이 지켜진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을 단순히 2030 남성집단이 정치적으로 보수화되는 경향이라거나 '일베'같은 사이트의 영향이라고만은 볼 수는 없다.


 높은 징집률로 유명한 한국도 1986년 무렵에는 현역판정율이 51%였다. 그것이 2000년대를 넘어서면서 낮아진 출생율로 점점 높아져서 현재는 현역판정율이 91%에 달하게 되었다. '억울함'으로 차별적인 조치를 요구하게 하는 정서는 이런 조건 아래서 나타났다. 민주화 이래로 개인의 인권의식인 점점 높아져만 가는데 군 내부 문화는 아주 느리게, 혹은 거의 변하지 않았고 징집률만 높아져 갔다. 거기서 발생한 불만은 절대 다수가 징집되는 집단의 외부로 향했다. 현역 대상자들 사이에서도 다른 조건에서 똑같은 의무를 수행하는 공익근무요원이나 상근예비역은 '병신'취급을 받고 면제자는 그 이하의 취급을 받는다. '진짜 군대'를 간 남자만이 '정상인'이고, 다시 그 '정상인' 내부에서도 관심병사, 부적응자, 보직이동자, 환자 등은 차별과 뒷담화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정상인'들은 언제 자신이 '병신'이 될지 전전긍긍하며 누군가 비난할 대상을 찾고 함께할 동료를 구한다.


 현재의 이런 징병제 시스템은 높은 스트레스와 '억울함'이라는 정서를 생산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정상인'의 눈에 징병되지 않은 자들, 여성, 장애인, 북한이탈주민, 트랜스젠더, 전과자는 의무를 지지 않은 무임승차자이자 비정상인으로 여겨진다. 유승준을 비롯한 병역면피자들, 혹은 그 혐의자들은 엄청난 매도의 대상이 되어 복귀조차 힘들게 된다. 그리고 군대에 적응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 여겨지고, 군대에 잘 적응한 사람들은 군사화된 사회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공간적으로는 부대에, 시간적으로는 21개월에서 24개월을 보낸 사람들에게 징병제라는 틀은 몸으로 배운 일종의 정상/비정상의 기준인 셈이다.


 지금 진행되는 일련의 개혁들은 이런 부분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군 학점 인정, 징집률 높이기, 봉금 인상,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징벌적 대체복무 추진은 쌓인 억울함은 조금 풀어줄지는 몰라도 억울함을 생산하고 차별을 만들어내는 시스템 자체는 무너뜨리지 못한다. 오히려 대체복무제의 제대로 된 추진이야말로 군 문화 개혁과 징병제 자체의 변화를 촉진시켜줄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지난 세기에 만들어진 총력전 체제의 해체가 필요하다. 군 복무 이후에도 군에 삶을 종속시키고 일상에서의 군의 우위를 확인시키는 예비군 제도, 사실상의 무료 노동력을 동원된 인원으로 메꾸는 사회복무요원 제도 같은 현역 이외의 제도들도 문제다. 근본적으로 징병제 자체를 검토하고 무엇을 위한 군복무인지, 이 국가와 공동체를 왜, 무엇으로부터 지켜야하는지 지금부터라도 생각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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