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가상화폐'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급증하고 있다. 그에 따른 투기과열, 급락과 급등, 거래소 해킹사건, 돈세탁 논란 등 여러 논란도 일어나고 있다. 이에 따라 규제 논의가 나오더니 급기야 법무부가 거래소 폐쇄 입법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법무부의 갑작스러운 거래소 폐쇄 발표에 경제부처와 청와대에서는 급히 진화에 나섰지만, 고강도 규제 쪽으로 향하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이때다 싶은건지 보수경제지를 중심으로 '국가가 시장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류의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경제지들이 가상화폐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기사). 신기술 발전을 막는 무능한 관료, (반공국가에서 더욱 효과적일)자유시장을 탄압하는 국가라는 이미지는 상투적이지만 효과적이다. '가상화폐'는 어느새 시장의 상징이 되었다.
'가상화폐' 광풍의 주역은 20~30대 청년들이다. 이들에게 이런 프로파간다가 유효한 것은 경험 때문이다. 나를 포함한 이 세대 청년들은 국가의 무능과 폭력성을 낱낱히 보고 자란 세대다. '세월호' 앞에서 국가는 너무나도 무능했고, 그 희생자와 가족들에게는 너무나도 폭력적이었다. 반면에 경제지가 보여주는 시장은 어떤가? 우리가 소비자로서 다가갈 때, 이들은 더없이 친절하고 깨끗하고 유능하다. 돈만 있다면 절대 우리를 자극하지 않고 원하는 바를 능숙하게 이루어주는 듯이 보인다. 우리 세대는 재래시장보다 대형마트를 선호하고 국가교육보다 사교육을 신뢰하는 시장의 자식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겪었던 국가의 무능은 단지 국가만의 무능인가? 세월호를 얘기할 때 가장 잘 보이는 타겟이자 가장 큰 책임을 지녔던 것은 분명 국가였지만, 그 국가가 무능하고 직무유기했던 부분은 시장에 대해서였다. 세월호의 불법개조, 과적 등의 무절제한 경제논리를 막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국가의 폭력성은 그들이 시장의 사냥개 역할을 자임했기 때문이었지 시장을 물어뜯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시장의 선한 모습은 거기서 발생하는 온갖 더러운 일을 국가에게 떠넘기고, 의도적으로 (규제완화라든지를 통해)국가의 무능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이미지를 보수경제지를 통해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지난 정권을 묘사하는 무능하고 포악한 대통령과 여기에 휘말린 불행한 재벌총수라는 이미지 말이다.
이런 국가에 대한 경계는 국가가 무능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국가에 무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가가 무엇을 하기로 정한 것을 뒤집을 수 없다는 생각이 국가를 두려워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그런 국가에 살지 않는다는 것을 지난 겨울의 항쟁이 보여주었다. 국가의 무능하고 텅 비어있던 자리에 이제는 정치를 끌어와야한다. 혼자 깨끗한 척, 능력주의인 척하는 시장이 만들어내는 불평등과 폭력성을 정치가 제어해야한다. 우리의 삶을 '보이지 않는 손'의 신학적, 운명론적 공간으로부터 우리 스스로 결정하는 정치적 공간으로 데려와야한다.
'가상화폐' 광풍이 그런 요구를 담고 있지 않은가? 규제에 분노하는 코인 투자자들의 빈정거림은 무엇인가? "자기들은 땅투기, 주식거래, 온갖 탈법적인 방식으로 벌어놓고, 서민인 우리가 벌 수 있는 코인은 규제하려한다." 기성세대가 독점한 '자유시장'의 밖에 놓여있다는 점이, 유일하게 굴욕과 좌절로 가득 찬 고용시장과 자영업 밖에 나타난 돈벌이의 가능성이라는 점이 '가상화폐'시장의 매력이었을 것이다. 이 분노는 규제를 향하고 보수 경제지도 그것을 부추기고 있지만, 근본적인 밑바닥 정서는 기성세대와 그들이 만든 경제적 조건들에 대한 분노다. '가상화폐' 광풍은 다른 경제적 광풍들, 로또, 스포츠토토 같은 것들이 최신의 형태로, '4차 산업혁명'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 것이다. 결국 근본적인 해결을 가능케하는 것은 우리의 경제적 조건들, 토지소유, 재벌, 만연한 갑질, 저임금 등을 바꿀 수 있는 정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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