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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글쓰기

청년 세대의 새로운 '반공주의'

by 비내리는날 2018. 1. 20.

 오늘 날 청년세대에게 반공주의가 남아있다고 주장한다면 비웃음을 살지도 모른다. 청년세대의 특징은 주로 자유주의, 개인주의, 실용주의, 현실주의 정도로 표상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떤 이데올로기로부터도 자유로운 것 마냥 그려진다. 그러나 최근에 터진 북한 관련 사건들을 대하는 청년세대의 반응에서는 이전 시대의 반공주의와는 다른, 그러나 새로운 '반공주의'라고 부를만한 어떤 것이 느껴진다. 얼마전 정부는 남북고위급회담을 통해 북의 평창올림픽 참여와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참가를 결정했다. 수년간의 경색국면에서 벗어나 '평화올림픽'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기뻐할 법도 하건만, 특히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반응이 냉랭하다. 단일팀 문제에서는 대한민국 선수들이 손해를 볼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오히려 분노하고 반대하는게 청년세대의 보편적 반응이다. 물론, 나 역시 대의를 위해 선수 개개인을 희생할 수 없다는 입장이며, 이것이 졸속으로 추진되었다는 비판에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주위에서, 온라인 상에서 보이는 청년세대의 반응은 단지 그런 것만이 아닌듯 싶다. 그들이 북한팀을 바라보는 시선은 마치 비정규직을 바라보는 정규직의 시선처럼 보인다. 뭔지 모를 이상하고 무능한 사람들에게 '우리'의 기회를 뺏겼다는 것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느껴진다. 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 보편적인 이런 르상티망(원한, 복수감), 억울함에서부터 오늘 날 청년세대의 신 '반공주의'를 파악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청년세대를 표상하는 자유주의/개인주의와 실용주의/현실주의가 나타내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 보아야한다. 지난 촛불에서 이들은 촛불을 들고 적극적으로 전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일조했지만, 동시에 원전 공론화, 대북정책, 비트코인 관련 문제에서 일견 보수적이고 '현실주의'로 해석될 법한 선택을 했다. 그러나 이 '현실주의'는 체념적 현실주의에 가깝다. 세상은 바꾸기 힘들고, 세상이 바뀌게 된다면 지금 가진 초라한 것들마자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대표적인 '현실적' 선택이었던 원전 공사 중단 논의에서보면, 청년세대는 짓고있는 원전 건설에는 동의했지만 원자력 발전 자체는 줄여나가야한다는 선택을 했다. 즉, 경제논리 때문에 직접적인 선택인 공사중단은 불가능하지만, (지금 당장, 직접적인 것이 아닌)멀리 보았을 때 원전은 줄여나갔으면 좋겠다는 선택을 한 것이다.

 자유주의/개인주의는 어떠한가? 그들은 무엇이든 자유롭게 하는 것을 추구하면서도, 혐오, 금지에 비판적이지 않다. (비백인)외국인 노동자를 추방하거나 입국제한하자는 주장을 서슴없이 한다. 이런 주장과 자유주의는 상충되보이지만, 타자의 거부라는 측면에서는 모순이 없다. 즉, '나는 제한 없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것이다'(자유주의)와 '나를 방해하고 불편하게 하는 것은 싫다'(차별, 혐오, 금지)라는 측면에서 같은 감성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가지 지점, 체념적 현실주의와 타자의 거부에서 르상티망이 나온다.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과 그것을 유발하는 현실을 극복할 수 없고, 거기에서 나오는 분노는 나를 귀찮게하고 신경쓰이게 하는 타자로 향한다.


 청년세대의 반공주의에서는 이러한 감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점점 힘을 얻는 반통일론은 "'가난한 그들'을 먹여살리기 싫다, 완전히 다른 그들과 같이 살아가는 것이 싫다"는 측면이 강하다. 통일론이나 과격한 북한 공격주장도 민족주의나 구시대적 반공주의가 아니라 "미개발지를 개발해서 잘살자", "우리를 자꾸 귀찮게 구는 놈들을 그냥 없애버리자"의 심성을 강하게 띤다. 완전히 우리의 의도와 이해 밖에 있는 타자와 공존과 교류를 추구하기보다 거부하고 회피하고 박멸하기를 원한다. 이들의 '현실주의'는 미국 중심의 냉전의 연장선상에서의 분단체제 극복도 그 불가항력적 힘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보고 이것이 흔들리는 것에 큰 불안을 느낀다. 한편, 이 새 반공주의에는 인종주의적인 부분도 보인다. 그들의 이념과 체제를 부정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들의 문화, 언어, 행동을 희화화하거나 타자화하고 가난하며 이해할 수가 없다는 식의 태도가 확산되고 있다. 가령 영화 <1987>의 악역 박처원의 악랄함을 돋보이는 것은 그가 쓰는 북한말씨이다. 사투리를 쓰는 조선족이 범죄자로 나오는 많은 영화들도 그렇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지닌 속성 그 자체다.


 새 반공주의는 옛 이데올로기의 자루에 새 감성을 담아 만들어졌다. 끊긴듯이 보였던 반공주의와 반공적 주체 생산은 새로운 형식으로 부활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주체와 반공주의는 결합하며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둘 다 자유시장을 추구하고, 반공주의가 생산한 적/동지의 이분법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체념하고 분노한 개인이 '적'에게 원한과 혐오를 쏟아낼 수 있도록 적을 지정해준다. 새로운 체제 하에서 분단체제는 안정적으로 지속되고, 신자유주의적 삶에서 탈출을 가능케해줄 사유와 상상력은 분단체제 하에서 제한된다. 체제 밖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은 '빨갱이', '공산당', '적', '간첩'의 혐의를 피하기 힘들다. 이런 새로운 악순환의 형성을 막기 위해서, 새 '반공주의'가 완성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신자유주의적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개혁과 분단체제의 극복은 불가분하게 추구되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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