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주간 대한민국은 미세먼지에 휩싸여 정말로 숨조차 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다니며, 외출을 자제하며, 누런 하늘을 보며 분노했다. 특히 사람들은 정부의 무대책, 그 중에서도 중국에 제대로 항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분노했다.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먼지들이 중국에서 날아온 것이고 그 근본 대책을 중국이 내놔야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세먼지의 발생 근원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지만 대체로 중국의 영향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중국의 책임'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중국 당국의 책임? 중국 인민의 책임? 혹은 중국이라는 땅이 잘못했다는 것인가? 땅이 잘못할 수가 있는가?
먼저, 중국이 얼마나 책임이 있는지 계량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이 있지만, 이는 무의미하다. 그것은 지나치게 표면적이다. 중국이 환경을 파괴하고 오염물질을 배출하고 있다면 왜 그러는건지 생각해보아야한다. 중국의 산업 중국의 경제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전지구적 차원에서 선진국들이 공해문제, 고임금, 노동환경 등등을 이유로 공장들을 저개발국가들로 보냈고, 중국 당국은 경제성장을 위해 공장들을 받아들였다. 선진국들은 금융과 서비스업 등으로 경제를 유지하고 중국은 경제성장을 댓가로 인민의 생활환경(노동조건, 자연환경)을 잃었다. 한국 역시 소비재들을 싼 값에 구입하고 각종 산업 시설들을 중국으로 이전했다. 이런 측면에서 '중국의 책임'이라는 것은 지나치게 모호하며 세계의 분업화 구조라는 큰 틀에서의 관점을 은폐시키는 것이다.
사실 중국에 대한 비난들은 이런 거대하면서도 단기적으로 해결이 어려운 문제에 대한 무능을 감추는 제스쳐이다. 그리고 그 문제 뒤에 자기 책임이 있다는 것을 회피하는 것이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대상에 분노를 쏟으면서 실제 해결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쌓인 감정을 해소시키는 것이다. 중국이라는 국가의 패권주의적 행태에 대한 피해자의식과 중국인에 대한 인종주의적 혐오감정을 뒤섞여있는 이러한 분노는 미세먼지에서 중국으로, 표면에서 표면으로 감정을 실어나를 뿐이다.
분노는 쉽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과 그로 인해 생기는 감정들을 눈에 띄는 대상에 분노라는 형태로 소비하곤 한다. 그러나 이 '쉬운 분노'는 문제가 꼬리물듯 이어지는 복잡함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차단한다. 그 영역 속에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책임은 어렵다. 어떤 문제를 대면한다는 것 자체가 책임의 시작이다. 그렇게 시작된 책임은 우리를 감당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영역으로 끌고 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고, 그 결과가 반드시 좋은 쪽으로 나타나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분노한다.
분노를 아끼자. 우리가 정말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대상이 아니라 모호하고 복잡하며 '정치적인' 영역으로 향해야한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사고할 것을 요구한다. 분노의 힘은 그 모호함과 복잡함을 우리의 사고가 헤쳐나가는 데에 쓰여야한다.
'정치적 글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원봉 서훈 논란에 관하여 (0) | 2019.04.27 |
---|---|
의회에서의 법과 폭력 (0) | 2019.04.27 |
보수언론의 '새로운' 반공주의 프레임 (0) | 2019.02.20 |
베네수엘라 사태와 민주주의 (0) | 2019.01.27 |
두발 자유화를 옹호하며 (0) | 2018.09.2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