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졸업한지 5년 가까이 되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두발과 복장에 관한 규정이나 검사가 그다지 빡세지 않아서 그런걸로 큰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다. 그래도 종종 '단속'이 이루어지곤 했고, 소위 양아치든 모범생이든 그런 검사는 등교하는 이상 피해갈 수 없었다. 이제 그 두발에 관한 규정이 폐지된다고 한다. 여기저기서 볼맨 소리가 들려온다. 아이들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아니, 아이들이 왜 통제의 대상인가?), 학생이 학생다워야 하는데 염색은 문제다(학생다움이란 무엇인가?) 같은 아주 보수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얘기들이 주를 이룬다. 그 가운데 그나마 좀 들어볼 만한 주장은 더 중요한 문제들(가령 스쿨미투의 문제들, 가난한 아이들에 대한 문제들)이 있다는 것과 이런 규제의 해제가 꾸밈, 특히 여성에 대한 억압으로서의 꾸밈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두발 자유화를 비롯한 일련의 자유화 조치들이 이러한 가치를 가진 문제제기들과 상충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두발 자유화를 단순히 '학생들의 꾸밈을 맘대로' 정도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다시 잠시 학창시절로 돌아가보면, 1기 진보교육감 시대 아래서 나는 무려 '체벌금지'와 '야자 자율화'의 좋아진 시절을 보냈다. 친한 선생님들 중에서도 이러한 자유화 조치들에 불만을 표하는 경우도 있었다. 교권이 무너진다는 얘기였다. 그 분들이 말하는 교권은 노동자로서의 교사의 권리가 아니라 학생들에 대한 교사의 통제권에 대한 것이었다. 질문을 되돌려야한다. 그 이전에는 체벌과 두발 복장 규제를 통해 학생들을 통제해왔다는게 아닌가?
그렇다면, 두발 복장 규제는 단순히 학생의 자유권에 대한 제약이 아니다. 교사의 학생에 대한 권한과 권력이 학생의 신체에 대한 자의적인 통제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학교마다 신체에 대한 세세한 규정이 있지만, 결국 그 규정을 적용하고 임의로 봐주든 엄격하게 적용하든 하는 것은 교사 개개인이다. 그렇게 교사는 일종의 주권자로서 학생들을 통치해온 것이다. 그렇다면 두발의 자유화는 학생 신체에 대한 직접적 지배라는 방식을 폐지함으로서 교사와 학생 간의 새로운 관계 구축을 촉진시키는 조치인 셈이다.
교사들이, 그리고 학생들이 이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교권의 회복'이나 '질서'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 수 십년 간 독재국가였던 나라에 민주주의 혁명이 이루어졌다고 민주국가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그 와중에 억압으로서의 꾸밈이 조장될지 줄어들지는 알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전처럼 교사들에게 반헌법적인 권한을 주면서까지 규제되어서는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금지시킬수록 어떤 매력을 느끼는게 인간 심리다. 교사들에게 주어진 신체에 대한 통제권, 학생에 대한 통치야말로 스쿨미투의 원인이 된 학교 내 성폭력의 구조적 요인이기도 하다. 무엇이 중요한 문제인가는 단지 표면적으로만은 알 수 없다. 다른 여러 문제들과 두발 자유화는 상충되지도 않고 어떤 한 가지가 다른 한 가지에 우선하지도 않으며 모든 문제는 단순히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한 점에서 두발 자유화 조치는 문제 해결의 시작점이 되는, 새로운 학교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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