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며칠간 국회에서는 폭력으로 뒤엉킨 상황이 연출되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아마 며칠은 더 저런 일이 이어질 것 같다. 국회에서 벌어진 폭력에 아마 대다수의 국민들이 개탄을 금치 못하고 있고, 언론에서는 시시각각 그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빠루를 든 나경원 의원의 사진은 폭력의 모습을 잘 연출해낸 걸작이었다. 여기서 내가 쓰고자 하는 것은 그런 폭력 사태에 대한 비판이나 사건의 본질에 대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많이 다루어지고 있다. 오히려 법과 폭력의 관계와 제도화된 폭력으로서의 의회에 대해 이번 사태를 예로 자세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발터 벤야민은 『폭력 비판을 위하여』에서 폭력을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으로 구분한다. 모든 수단으로써의 폭력은 법을 만들어내거나 법질서를 보존(유지)하고자 하는 성질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폭력은 법질서를 위협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법을 창출해낸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법은 강제력으로 자기 자신을 보존하려 한다. 법의 이러한 성질은 의회라는 형태로 제도화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민중의 불만이 폭력으로 이어져 법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법을 정립시키는 대신, 투표라는 형식으로 대표자를 선출하고, 선출된 대표자는 법을 제정한다. 제정된 법은 경찰, 검찰, 군대 등의 폭력집단을 통해 자신을 보존한다. 물론 꼭 민중의 폭력만이 법을 창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역사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이승만 정권은 해방 전후의 혼란상태를 군과 경찰을 동원한 폭력으로 진압하고 그에 맞춰 국가보안법, 계엄법을 통과시켰다. 박정희의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의회는 폭력과 법을 둘러싼 복잡한 관계를 다소 비폭력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제도화된 기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국회선진화법은 국회 내에서 벌어지는 폭력사태를 방지하고자 만든 이중의 장치에 가깝다. 이 법은 국회의원들의 이익 때문만이 아니라 국회 내 폭력을 거부하는 국민의 압력에 영향을 받아 통과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법이 지난 며칠간 무너져 내렸다. 사법부에 의해 처벌받을 수도 있겠지만, 삼권분립의 원칙 때문에 과연 제대로 처벌받을지 의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국회선진화법은 폭력을 해소하는 역할로 선출된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폭력으로 무력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폭력을 도식화해보자면 국민-의원-법으로 이어지는 제도화된 법정립적 폭력, 법-국회경위-의원에 대한 법보존적 폭력이 충돌하고 있다. 입법자가 폭력으로 법질서를 무력화시켰다는 것은 입법자로서의 역할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유일한 입법 기관으로서 각 의원이 갖는 권한과 책임의 막중함이라는 면에서 과연 그들에게 의원의 임무에 대한 자각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지난 4월 3일, 국회 앞에서 "노동기본권 쟁취, 노동개악 분쇄"를 외치던 민주노총의 대오가 담장을 허물고 국회로 넘어왔다는 이유로 연행되었다. 경찰은 이에 대해 압수수색 및 출석 요구를 요청하며 빠르게 수사하고 있는 중이다. 확실히 이들의 폭력도 기존의 법질서를 무시한 폭력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의원들이 자신들이 선출된 취지를 망각하고, 자신을 선출해준 국민을 법의 이름을 한 폭력 아래로 몰아넣는 행위에 대한 분노가 폭력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다. 만약 우리의 입법자들이 자신들의 역할과 위치를 자각하지 못한다면, 국민들은 제도화된 방식이 아닌 날 것의 폭력으로 법에 대한 자신들의 고유의 권리를 주장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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