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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글쓰기

베네수엘라 사태와 민주주의

by 비내리는날 2019. 1. 27.

 지금, 베네수엘라에는 대통령이 둘이다. 하나는 부정선거와 헌정파괴의 혐의자이자 차베스의 후계자인 니콜라스 마두로 현 대통령이고, 또 하나는 '인민의 의지'당의 지도자이자 유명무실해진 국회의장인 후안 과이도이다. 이 사태의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그 이전 정권인 우고 차베스 대통령 시절로 돌아가보아야 한다. 반(反)신자유주의와 21세기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집권한 우고 차베스 정권은 석유 재국유화를 통해 큰 수익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빈민구호정책을 펼쳤다. 한편으로는 강력한 반미 노선으로 진보 좌파 성향의 주변국 정권들을 조직하며 쿠바, 니카라과, 볼리비아, 노동당 정부 시절의 브라질과 함께 미국의 눈엣가시 역할을 해왔다. 또한 양당제 체제가 구축되어있던 베네수엘라를 변화시키기 위해 대중운동을 기반으로 제헌의회를 설치, 새 헌법을 발포하고 적용하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는 우익의 적대세력으로부터는 정치탄압이자 독재 시도로 여겨졌고, 아마도 미국의 후원 아래 벌어진 2002년의 군부 쿠데타와 2004년 자신이 만든 국민소환투표로 대통령 직에서 쫒겨날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2013년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그의 통치 시기는 양면적이었다. 한편으로는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무상주택, 빈민에 대한 기초식량 지급 정책이 이루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야당인사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지고, 우익성향인 노조에 대한 국가 감시제도를 도입하고, 제헌의회 도입과 사법부 장악으로 입법부를 무력화시켰다.


 차베스와 21세기 사회주의의 성과가 지금처럼 완전히 붕괴해버린 것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그들이 지나치게 석유자원에 의존했다는 것이다. 오일머니로 이루어진 경제체제는 미국의 석유증산, 대체에너지의 개발, 셰일가스 발견으로 석유가가 크게 하락하면서 무너졌다. 비록 과거 칠레 아옌데 정권의 구리 산업국유화 정책이 낳은 경제파탄처럼 그러한 결과가 미국의 적극적 견제 때문이었을지라도 자원의존도를 높여 추진한 정책들이 갖는 리스크를 피할 대책을 짜놓았어야했다. 둘째로 남미의 동맹 좌파 정권들의 몰락 때문에 공조가 무너졌다는 점이다. 룰라-호세프로 이어진 브라질 노동자당 정부는 의회쿠데타로 무너지고 극우 보우소나르 정권이 들어섰다. 칠레 역시 우파 정권이 들어섰고, 베네수엘라 좌파 정권에 우호적이던 아르헨티나의 키르치네르 정부는 우파 마크리 정부로 교체되었다. 각국의 경제적 협력으로 서로를 지탱해온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 역시 흔들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차베스를 이어 대통령이 된 마두로는 차베스만큼의 카리스마나 이력을 가지지 못했고, 계속된 경제난으로 화폐체계가 붕괴하고 난민이 발생해 수백만명이 인접국으로 탈출해버리기까지 했다. 거기에 2013년 차베스 사망 이후부터 거리시위가 계속되고 있고 수도 카라카스의 치안 상태 역시 최악으로 치닫고 있으며, 각종 부정부패 스캔들이 터져나왔다. 작년에만 8월의 드론 암살 시도, 일부 군인의 쿠데타 선언이 있었고, 그 배후에 미국과 콜롬비아가 있다는 의혹으로 국내외 적대 세력에 대한 탄압의 강도 역시 올라가고 있다. 시위가 격화되자 국회의장에 새로 취임한 후안 과이도는 대통령 궐위 시 국회의장이 새 대통령 선출 전까지 대통령직을 맡는다는 헌법 규정에 따라 현 마두로 대통령을 부정하고 스스로 임시 대통령임을 선언했다. 이에 대해 마두로 대통령은 이는 헌법 위반이라며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 남미 우파 정권들은 즉시 과이도를 대통령으로 인정했으며, 러시아, 중국과 남미 좌파 정권들은 마두로를 지지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옳다고 봐야할까. 어느 쪽이 더 '민주주의'적인가. 아니, 민주적인 것은 옳은가. 우리는 이미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내전에서 독재정권의 붕괴가 민주주의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을 보았다. 오히려 그것이 민주주의와 자유의 이름을 앞세워 제3세계에 대한 새로운 개입(그러나 제국주의 시대와 그닥 다를게 없는)임을 보았다. 그러면서도 이라크와 시리아의 아랍사회주의는 폭압적 독재를 통한 사회개혁이 어떻게 주저앉는지, 민중의 분노로 무너진 정권의 최후가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먼저, 절차적 민주주의 여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절차상으로는 대선의 승리자인 마두로가 대통령임이 틀림이 없다. 물론 부정선거 의혹이 있지만, 적어도 절차상의 하자는 없었고 야권의 불참 속에 이루어진 선거였기 때문에 큰 표차로 승리한 것에 부정선거의 여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한편, 임시대통령 과이도는 헌법 상 궐위 조항을 내세우긴 했지만, 불참한 대선결과를 부정하고 부통령도 아닌 국회의장에게 바로 임시대통령 직위를 부여하는 것은 절차적으로 상당한 문제가 있다.

 그러나 나는 절차상의 하자가 민주주의 여부, 정치에 있어서 진리의 여부에 핵심적인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체제 자체가 부당하다면, 그리고 합법적 수단 자체가 봉쇄되어있다면 절차가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 구체제 자체를 부정한다면 그 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맞다. 그렇기 때문에 로베스피에르는 군중의 요구에 부응해 국민공회와 공안위원회를 소집했고, 레닌은 1917년 10월 임시정부를 붕괴시켰던 것이다. 위기의 순간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선택으로 가본 적이 없는 길을 가는 것이 혁명 아닌가. 낡은 절차와 다를 것 없는 선택지 속에 새로운 것을 담아낼 수 있을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19세기 민중의 격동 속에서 정치세력들이 왕당파냐 공화파냐를 두고 싸우는 사이에 마르크스는 그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혁명을 추구했던 것이다.


 현재 베네수엘라 야권이 적으로 삼는 우고 차베스와 니콜라스 마두로 역시 그들이 추구하는 21세기 사회주의를 실현 위해 구체제를 부정하고 민중의 힘으로 제헌의회를 설치했다. 과이도가 스스로 베네수엘라의 지도자임을 주장하려면, 그가 제시해야하는 것은 외세의 지지와 임시대통령직의 절차적 정당성이 아니다. 분노한 베네수엘라 민중의 요구가 무엇이며, 그가 그들에게 제시할 언어는 무엇인가. 21세기 사회주의를 무너뜨리고서라도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굶주리고 있다는 베네수엘라 민중에게 보여주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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