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패배는 어떻게 가능할까?
두명의 패장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전장으로 나서는 이들은 대부분 비참한 심정일 것이다. 정말 소수만이 자신의 패배가 의미있는 패배이기를, 아름다운 패배로 기억되기를 바라며 출전할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대부분의 패배는 잊혀진다. 그렇기에 패배할 것을 너무나도 명확하게 알았음에도 끝까지 결기를 놓치지 않고 싸워간 1980년 전남도청의 그들을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방선거가 끝났다. 모두가 민주당 후보를 제외하고는 힘든 선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나마 자유한국당 정도만 15%정도를 득표할 것을 생각하며 재산상의 손실을 고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나머지’ 정당들이다. 10%를 넘기는 것 조차 불투명한 출마였다. 진보정당이야 늘 그래왔으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바른미래당 등의 꽤 많은 출마는 당적 관점이 아니라, 후보 각각의 개개인으로 보았을 때에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들의 출마는 정말로 차기를 노리기 위해 후보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인지, 애당심이 넘쳐 당명을 알리기 위해서인지, 혹은 자신들의 신념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이번엔 될 수 있다는 ‘후보병’인지는 스스로 말할 때까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바른미래당의 창당을 주도했고, 당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서울시장 후보 안철수는 선거에서 패배하자 15일에 미국으로 떠났다. 선거가 끝난지 이틀만에 출국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틀은 짧은 시간만은 아니니 자신을 도와준 주변 사람들과 인사와 위로를 나누기에 충분할 시간일 수도 있다. 그리고 힘든 선거를 끝냈으니, 누구보다도 가족을 보고 싶은 마음도 이해한다. 하지만 장진영의 분노처럼 전국의 수많은 후보들이 선거비용 보전권에서 벗어나 빚더미에 앉고, 자신이 핵심인 당이 선거에서 대패한 상황에서 주변을 충분히 돌보지 않고 출국한 것은 누가봐도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운 행동이다. 당연히 당선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자신들의 당원조차 안철수에서 마음을 잃었다는 것은 선거 과정과 결과를 의미 있는 패배, 아름다운 패배로 남기려는 노력이 없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반면 안철수와 맞붙었던 다른 후보가 있다. 녹색당의 신지예 후보이다. 선거 규모, 인지도, 득표율 등에서 사실 안철수와 맞붙었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그러나 선거운동 과정에서 신지예가 던진 메시지는 안철수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리 사회를 진보시켰다. 1.7%라는 득표율은 아쉬운 수준이지만, 청소년 대상으로 박원순을 이겼다는 것, 압도적 승자인 박원순도 신지예의 정책을 받았다는 것에서 큰 의의를 남겼다. 아름다운 패배를 넘어서 내용적 측면과 과정에서는 승리했다.
많은 경우에 진보정당은 선거에서 이기지 못한다. 그렇기 떄문에 선거를 앞두고 늘 고민하는 것은 “어떻게 질 것인가?”이다. 윤태호의 <미생>을 매주 챙겨본다. 최근화에서 장그래는 새롭게 회사에 합류하는 한그루라는 사원과의 관계를 고민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떻게 질 것인가. 승부가 끝났는데도 상대의 실수를 집요하게 유도하는 것도 수치이고, 최후의 순간까지 역전의 기회를 노리지 않는 것도 수치이다. 분명 돌을 던져야 할 때 던지지 못하는 것도 기사로서 수치이고, 좀 더 모색하지 않고 쉬이 돌을 던지는 것도 수치이고 이미 승패에 대해선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 순간 어떻게 질 것인가.”
낙선할 것을 알고서도 출마하는 후보들은 모두 장그래와 같은 고민을 할 것이다. ‘아름다운 패배’, ‘질서있는 후퇴’만이 패배에서도 다음을 기약하게 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과정과 결과에서 다른 행보들을 보인 두 후보는 다음에서의 차이가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시작을 고민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과거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 훨씬 엄혹하던 시절, ‘고문’에 관한 이야기이다. 경찰이 고문을 하는 이유는 단순하게 상대방에게 정보를 알아내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이하로 대상자를 다루면서 후에 대상자가 다시 일어나려 하는 모든 의욕을 꺽어 놓기 위함이라고. 현재의 선거제도는 과거의 고문과 같다. 15% 이상 득표시 선거비용 전액 보전, 10% 이상 시 반액 보전, 그리고 큰 액수의 기탁금. 이는 소수 정당들이 한두번 선거에 지쳐 모든 의욕을 포기하게 만드기 위함이다.
이런 물적 조건에서 무엇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기성 정치의 견고함 틈에 어떻게 틈새를 만들어볼 수 있을지, 어떻게 의욕이 꺽이지 않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 다시 시작을 고민한다.
'정치적 글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폭과 계엄군 (0) | 2018.07.22 |
---|---|
정치적 현실주의와 메시아주의 (0) | 2018.07.01 |
버티기, 그럼에도 (0) | 2018.06.28 |
현대 중동 사회의 역사와 정치 - 1 (0) | 2018.06.24 |
임정법통론의 진보적 해석과 48년 건국론 비판 (0) | 2018.06.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