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현실주의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좌우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주장하는 어떤 상식이다. 모두가 자신의 주장이 현실적이라고 말하며 상대의 주장을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이라고 비판한다.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에서 후퇴된 방안을 내는 것이 이들이 주장하는 현실주의인 듯 하다. 최저임금 1만원, 근로시간 단축, 동성결혼 법제화, 여성할당제, 심지어는 난민 수용마저도, 거의 대부분의 정치적 쟁점들에서 퇴행이 일어나면서, '현실주의자'들이 승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현실주의자'들은 현재의 구도와 조건들을 마치 불변의 토대로 여긴다. 이들의 전제를 수용한다면, 미래라는 시간은 현재라는 조건에 묶여 있으며 오로지 현재로부터만 나오기에 현재에 종속되어있다. 이들의 미래는 현재의 변형이지 새로운 무엇이 아니다. 여기에는 어떤 기적적 요소도, 급작스러운 변화도 없다. 이들에게 역사는 진보하지만, 그것은 예측 가능하며 현재와 단선적으로 연결된다. 거기에는 어떤 새로운 것도 없다.
이러한 인식 아래서는 혁명적 요소가 없다. 미래는 납작해진다. 그러나 정말로 이들은 현실적인가? 지난 2016-17년 촛불은 예측 가능한 것이었나. 그것은 '현실적'이었는가. 첫번째 촛불과 두번째 촛불 때까지만 해도, 야당들은 퇴진은 커녕 책임총리, 2선 후퇴를 내세웠다. 촛불이 전국민적 운동이 되고 나서도 명예로운 퇴진을 운운했다. 퇴진이나 탄핵은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여겨졌다. 좀 더 시간을 전으로 돌려보면,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각종 개악들이 벌어졌을 때, 그리고 2015년 민중총궐기가 벌어졌을 때, 반대세력에게 비현실적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역사학계의 모 교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면서도 그것을 막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대안으로 국정 체제 아래서 역사 독립을 추구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지금의 입장에서 그런 주장은 퇴행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당시에는 대단히 진지한 타협안이었을 것이다.
역사는 지나가고 나서 볼 때는 어떤 필연성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헤겔에게 역사는 어떤 절대정신을 향해 흐르는 법칙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헤겔의 입장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는 또한 이성의 간지(奸智)를 말했다. 즉, 우리가 어떤 의도로 무엇을 행하든 역사는 그 의도를 따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젝은 이를 19세기 프랑스의 반동 왕당파에 빗대는데, 프랑스의 왕당파들은 공화주의를 전혀 따르지 않고 이를 비웃었고 오로지 정략적인 이유에서 공화주의의 이념을 따르는 척하고 공화정 시스템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왕당파의 승리가 아니라 왕당파마저도 공화정 시스템에 빨려들어가버리는 것이었다. 정치적 현실주의자들이 자신에게 내재해있다고 주장하는 원칙을 그들이 생각하는 "현실"에 따라 배반한다면, 그 결과는 원칙의 현실화가 아니라 퇴행일 뿐인 셈이다(실은 한국의 현실주의자들에게 어떤 원칙이나 이상이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어떻게하면 변화시켜야하는 현실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을까. 미래를 현재에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이미 미래적 요소가(그리고 과거가) 내재한다고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현재에서 어떤 조건을 읽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읽자는 것이다. 종교적 메시아주의자들이든, 정치적 메시아주의자들이든, 메시아주의자들은 역사 속에서 강력한 힘을 보여주곤 했다. 독일의 종교개혁 시기 농민전쟁이, 중국의 태평천국운동이, 조선의 동학농민전쟁이 그랬다. 이들은 현재에서 도래할 미래의 흔적들을 읽어내고, 방향은 제각각이었지만 더 나은 세상이 이 땅에 도래하리라고 믿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이 행동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이들은 내세를 주장하는 종교인들과는 다른 부류인데, 이들은 종교인들이 믿는 이상적 내세(주류 신앙인들은 현세와 분리된 이 개념을 통해 현실의 정치체와의 적대를 피하고 대신 그 속으로 파고들어갔다)를 현세에 도래시키고자 했다. 이들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 기적을 믿었다. 물론, 우리는 다시 현재의 시점에서 그 사건들을 이렇게 저렇게 해석할 수 있다. 그들을 움직이게 만든 경제적 조건들, 사회적 변화들, 국제적 상황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후적일 뿐이다.
나중에, 라는 단어는 정치적 현실주의의 전형이다. "지금은 다수가 아닌 것으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이니 불가능하다." 현실주의에 반대하는 정치적 메시아주의는 현실을 부동의 토대로 석화(石化)시키는 그들의 주장을 배격하고, 현재에서 어떤 가능성을 읽어내며,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이를 도래시키기 위해 투쟁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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