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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글쓰기

임정법통론의 진보적 해석과 48년 건국론 비판

by 비내리는날 2018. 6. 23.

 이제는 해묵은 소리가 되버렸지만, 재작년 무렵까지 역사학계를 비롯해서 여기저기서 건국절을 지정하고 48년 정부수립을 건국으로 변경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었다. 그 배후에는 물론 박근혜 정부의 지원을 받던 극우세력이 있었다. 촛불과 정권교체로 이제 그러한 목소리는 거의 사그라들었고,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3.1절 기념사에서 임정법통이 건국의 뿌리임을 확고히 선언했다. 그러나 단 몇 년 전만 하더라도 48년 건국은 상당히 첨예한 논쟁 대상으로 보였고, 극우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자칭 '현실주의자'들이나 실증주의자들도 임시정부를 세운 것을 건국으로 볼 수 없고, 실체로서의 국가가 세워진 48년 정부수립이 건국이 아니냐는 주장을 했었다. 지금이야 그러한 주장이 일시적으로 사그라들었다고 하더라도, 48년 건국에 대한 제대로 된 비판과 임정 수립과 법통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없다면 언제 다시 논쟁이 타오를지 모른다.


 극우주의자들이 48년 건국론을 내세웠던 이유는 주로 정략적 입장에서였다. 건국대통령으로 이승만을 강조하고, 남한만의 단독 정부였던 48년 정부수립을 옹호하여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이고 북한은 단지 불법점거세력임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었다. 건국의 아버지가 필요하다는 가부장제적 인식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여기에는 지금의 국가 자체가 좌익과 임정세력을 거의 배제한 48년 정부수립에서 왔다는 사실과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는 헌법전문의 모순을 해결해야한다는 목적도 있었다. 반면, 임정법통 옹호자들은 주로 극우주의자들의 목적 중 전자, 이승만 옹호와 반통일적 성격을 비판했고, 유효한 비판은 친일 비판 논리를 통한 것이었다. 한편, 좌파 등의 일부에서는 건국론과 임정법통론 모두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등의 다양한 독립운동과 민중운동을 배제한다는 점을 들어 비판했다. 또한 국가의 법통, 역사적 연원을 따지는 것 자체가 필요한 것인지를 따지는 비판도 있었다. 이러한 비판을 염두에 두고서 임정법통론을 진보적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있는지, 현재의 국가와 임정법통론과의 모순이 해결불가능한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그 전에 48년 건국론을 검토해보고 싶다. 48년 5월 유엔의 감시하에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정부가 8월 15일 출범했다. 이 때 세워진 정부는 혁명과 쿠데타, 항쟁으로 계속 변해갔지만 기본적으로 남한의 국가의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48년에 세워진 정부는 근대국가의 기본 요소라고 하는 영토, 인민, 주권을 가졌고 폭력의 독점자로서 군대와 경찰을 보유한 해방 이후의 조선인의 첫 집단이었다. 문제는 이들이 행사하는 주권이 어떻게 형성되었냐는 것이다. 해방 이후에는 좌우익의 대립도 대립이지만, 좌우익 구분 없이 강렬한 민중운동이 계속되었다. 좌익도 우익도 각자 정치집단을 구성하고 조직했다. 특히 좌익은 46년 9월 총파업, 10월 대구 항쟁, 48년의 2.7 투쟁과 제주 4.3 항쟁, 여수순천의 반란과 봉기로 이어지는 계속된 민중운동을 주도했다. 48년 정부는 이러한 민중운동을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학살을 자행하면서 등장했다. 이는 근대국가로서 대한민국이 유일한 합법적 폭력집단임을 확고히 했고(실은 이는 순환적인 것이다. 폭력으로 법을 구축하고, 다시 그 법이 폭력을 합법화시켜주는 구도인 셈이니), 국가가 인간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국가가 인간을 국민인지 아닌지, 죽일지 살릴지를 정하는 폭력을 행하므로서 지배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폭력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로 지배를 스스로 구축한다는 것이 48년 건국론이 담고 있는 함의인 셈이다.


 반면, 임정법통론은 헌법 전문에 적혀있는대로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국가의 시초로 보는 것이다. 임정은 영토도, 인민도, 주권도 없고 법을 집행할 무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임정은 3.1운동이라는 조선인민의 해방적 폭력으로 형성되어 스스로 조선인민의 전위로서 등장했다. 이들은 언제 도래할지 알 수 없는 독립을 반드시 도래할 것으로 믿고 그것을 앞당기기 위해 투쟁했다. 지금이야 일본제국의 몰락이 마치 필연적인 것으로 보이고 조선의 독립이 당연한 것으로 보이지만, 당시에는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들은 한인애국단의 폭탄투쟁처럼 현 질서(당시로는 일본제국)가 강요하는 죽음의 공포를 거부하고, 억압하는 현 질서를 강요하기 위한 지배적 폭력이 아니라 정의로운 새 질서를 도래시키기 위한 해방적 폭력을 실행했다. 

 또한, 임시정부는 장제스 국민정부의 무조건적인 환대를 통해서 투쟁을 계속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작은 망명자 조직은 중국 국민정부에 어떤 이익을 갖다주기는 커녕, 일본제국과의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요소였지만, 이들의 환대 덕분에 임정이 존재할 수 있었다. 반면에 48년 정부는 막 나타나기 시작한 냉전질서를 수립하고자하는 미국과 소련의 전략과 남한 내 우익 정치세력의 이익의 일치를 통해 탄생한 것이었다. 48년 건국론을 반대하고 임정법통을 옹호한다는 것에는 이익과 전략이 아닌 국가 없는 자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환대가 우리의 역사적 기반으로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있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48년 정부수립을 통해 실체적 국가가 된 대한민국과 임정법통론 간의 모순은 해결불가능한 것인가. 임정세력은 해방정국에서 각 세력의 방해로 핵심정치세력이 되지 못했고 정부수립에도 참여하지 못했으며 김구 암살과 임정계인 한국독립당에 대한 탄압, 뒤이은 전쟁으로 소멸했다. 이로 인해 인적으로 현재의 국가와 이어지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임정법통은 현재의 국가와 모순이다. 그럼에도 임정법통이 가지는 모순을 통해, 모순이 주는 불편함을 통해 임정과 그들의 투쟁이 가지는 의미가 환기되고, 해방적 폭력과 국가폭력의 교차점으로서(대한민국 최초의 국가폭력은 임정의 김립 암살이다) 끊임없이 되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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