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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글쓰기

현대 중동 사회의 역사와 정치 - 1

by 비내리는날 2018. 6. 24.

 오늘날 우리에게 중동(Middle East)이란 무엇일까. 아랍, 이슬람, 전쟁, 테러, 석유와 부자 왕국? 네이버 뉴스에서 중동을 검색했을 때 중동지역에 해당하는 기사 중 눈에 띄는 것은 중동의 경제, 기업들에 대한 것과 전쟁에 대한 것이었다. 한편으로 예멘 내전의 격화로 인한 난민 유입에 대한 강력한 혐오가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를 타고 퍼져나가고 있다. 그 배후에는 극우 기독교세력이 존재하지만, 일상에 만연한 차별감정과 공포를 타고 전반적으로 무슬림, 난민 혐오정서가 널리 퍼지고 있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는 중동 지역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적어도 왜 그 땅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는지(혐오자들은 그것을 중동지역의 고질적인 문화, 혹은 이슬람 종교의 후진성으로 본다.), 그리고 그 땅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퇴행의 움직임은 어떤지 알아야하지 않을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 역시 다른 지역에 비해 이 지역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못하다. 이 글은 그 동안 내가 공부한 중동 지역의 현대사와 정치에 대해 나름 정리하고자 작성했다. 아주 얕은 공부로 적은 글이기에 틀린 부분이 많을 것이다. 대충 이렇구나, 정도의 글로 읽어주기를 바란다.


 중동(Middle East)이라 함은 본래 서양의 기준에서 중국와 한국, 일본 등의 극동과 터키 등의 근동의 중간 지역을 부르는 말이었다. 점차 근동을 포함한 서아시아 전반을 이르는 말이 되었고, 오늘날에는 북아프리카의 아랍권, 무슬림 사회를 포함하기도 한다. 아랍은 북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 메소포타미아 등의 아랍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을 부르는 말이다. 이 지역은 대체로 이슬람교를 믿으며, 유대교, 정교회, 조로아스터교와 그 외의 소수 종교들을 믿기도 한다. 현대 중동의 역사는 2차 대전 직후 각 지역들이 유럽 열강으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본래 오스만 제국의 질서 아래 있던 각 지역이 이집트를 시작으로 열강의 침략으로 분할되었으며, 오스만 제국이 1차대전의 패배와 개혁실패, 뒤이은 청년 장교들의 쿠데타로 붕괴되면서 각 지역이 나뉘게 되었다. 아랍 사회는 기본적으로 부족 단위로 생활하는 부족주의 사회였다. 주요 부족이 지역의 왕가로서 대표적으로 트란스요르단의 하심 왕가, 아라비아의 사우드 왕가 등이 있었다. 하심 왕가는 예언자 무하마드의 직계자손 가문으로 성지 메카와 메디나의 수호자 역할을 했는데, 사우드 가의 침공으로 성지에서 쫒겨났으나 영국과 손을 잡고 반 오스만 투쟁을 벌여 트란스요르단(오늘날의 요르단)과 이라크의 왕가를 얻었다. 영국은 이들에게 범 아랍 왕국을 약속했다(그러나 실제로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대인들에게 약속했고, 일부러 왕가의 차남에게는 트란스요르단을, 삼남에게는 이라크를 나눠 넘겨주었다). 아라비아의 사우드 왕가는 18세기의 이슬람 개혁운동인 와하비파 운동을 지원하면서 아라비아를 장악하고 쫒겨나고를 반복하던 중, 네지드 지방을 중심으로 하심 가를 몰아내며 아라비아 지역을 장악했다.

 한편으로 서구 열강의 지배로부터 두 가지 정치, 종교적 지향이 나타났는데, 하나는 아랍민족주의였다. 다른 민족주의들과 마찬가지로 서구의 침략과 지배를 통해 아랍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한 아랍인들은 주로 엘리트 계층이었다. 또 하나는 이슬람주의로, 대표적인 단체가 이집트의 이맘(신학자) 하산 알-반나의 무슬림 형제단이었다. 이들은 서구 열강의 침략에 반대하고, 부패한 왕가, 토호들을 타도하고자 했으며, 사회를 이슬람의 원리에 따라 개혁하고하 했다. 이들은 초기에는 무장투쟁에 나섰으나, 후에는 빈민에 대한 복지사업, 학교 건설 등 풀뿌리 단체로서 아랍인 사회 속에서 퍼져나갔다.


 이 지역의 현대사를 뒤흔든 핵심적인 사건은 이스라엘의 건국이었다. 유럽과 중동 각지에 퍼져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유럽에서 지속적으로 탄압받았는데, 프랑스에서의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정치적 시온주의가 탄생했다. 시온주의는 약속의 땅인 이스라엘 땅에 국가를 세우고 그 곳에 다분히 이상적이고 공존적인 국가를 세우자는 시도였다. 러시아 제국에서 벌어지는 포그롬(조직적인 유대인 학살)에 질린 러시아계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했다. 2차 대전과 대학살로 유대인 국가의 필요성은 절실해졌고, 영국, 소련 등의 열강의 옹호 아래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이 세워졌다. 초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사회주의의 영향을 짙게 받은 세속주의 좌파 시오니스트들이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토지의 85%를 소유하고 있던 아랍인들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48년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언하자 1차 중동전쟁이 개시되었다.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 레바논, 요르단 연합군에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무장대까지 가담한 전쟁에서 이스라엘 군은 부실한 무장에도 불구하고 분열된 아랍 연합군을 격파하고 기존에 UN이 제시한 분할안 이상의 영토를 확보했다. 각 왕국 간의 갈등에 아랍 연합군은 지리멸렬했고, 끝내 패배한 것이다. 이 전쟁의 여파로 수 많은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해 아랍 각국으로 퍼져나갔다.


 패배한 아랍 왕국들 내부에서도 이로 인해 큰 변화가 생겨났다. 각국에서 아랍 민족주의 운동이 격화되었고, 패전한 군대 내부의 청년 장교들을 중심으로 부패한 왕정을 타파하고 서구 열강의 영향력을 줄이며 유대인 국가를 몰아내려는 시도가 생겨난 것이다. 패전 후 3년만인 1952년, 이집트에서 파루크 왕가를 축출하는 자유장교단의 쿠데타가 발생했다. 쿠데타의 얼굴은 전쟁 영웅 무하마드 나기브였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청년 장교들의 지도자였던 가말 압델 나세르가 있었다. 온건파 나기브는 갈등 끝에 물러났고 나세르는 1954년 이집트 대통령 직에 올랐다. 이집트에서 일어난 쿠데타는 곧 중동 전역에 나타날 새로운 개혁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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