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근우가 김희철에게 했어야 하는 건'에 부쳐 - 지식인을 말하는 지식인
지식인은 어떻게 서발턴을 창조하는가? 임지은씨는 슬로우 뉴스에 기고한 글 ‘위근우가 김희철에게 했어야 하는 건’이라는 글을 통해서 김희철을 언어가 없는 자로, 위근우를 언어라는 특권을 가진 자로 규정한다. 이 얼마나 오만한가! 이 글에 드러나지 않은, 진정으로 언어를 가지고 타인을 규정하는 자는 필자인 임지은씨다. 김희철은 자신의 언어로 분명하게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표현했다. 그는 언어를 가지지 못한게 아니라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표현한 것이다. 그를 언어를 갖지 못한 서발턴으로 여기는 것은 김희철의 언어와 의사를 짓밟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필자는 본의 아니게 위근우가 저지른 실수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나는 이 글에서 위근우 대 김희철의 논쟁의 내용에 대해 판단할 생각은 없다.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바는 어떻게 지식인이 타인을 담론적으로 규정하고 판단함으로써 자신을 위치짓는가이다. 임지은씨는 글에서 위근우가 “설리와 구하라를 괴롭혀온 것과 같은 매커니즘의 해석을 택했다. 개인을 지우고 거룩한 대의를 남겨두었”다고 판단한다. 확실히 슬픔에 잠긴 동료를 이성의 칼로 베어내는 것은 그다지 윤리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개인을 지웠는가? 그는 단지 망자들이 추구했던 삶의 일면을 강조했을 뿐이다. 페미니즘이라는 대의를 추구했던 것은 망자들 아니었는가? 대의가 개인을 지운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추구한 망자의 삶의 일부도 지우는 것이다.
“구하라도 설리도 자신을 표현할 언어를 찾다가 좌절했다.”라는 표현도 문제적이다.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망자들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를 제대로 수신하지 못했고, 그래서 많은 비난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언어가 없었는가? 오히려 망자들은 나름의 언어와 실천을 통해 우리에게 그들의 삶을 설명하는 페미니즘적 메시지를 전했다. “연예인들에게는 세련된 지성의 언어”가 주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수신하는 자들이 그들의 언어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위근우가 언급하는 “설리의 삶을 존중하고 응원해준” 페미니스트들이 바로 그들의 메시지를 수신한 사람들이 아닌가.
임지은씨는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식인의 의미는 세련된 언변이 아닌 해석가능성에 있다. 단어와 생에는 여러 함의가 있고, 특권을 가진 사람일수록 더 많은 해석가능성을 찾아내야 한다.”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누가 더 많은 해석 가능성을 찾아냈는가? 망자를 그저 피해자로 남기려 하는 김희철인가, 아니면 망자들의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찾아내고자 하는 위근우인가. “우리는 윤리적으로 우월해지려는 게 아니라 함께 가기 위해 윤리를 꺼내올 뿐이다.” 누가 윤리적으로 우월해지려 하고 있는가? 적어도 한 개인의 의견을 언어 없는 자의 분노로 둔갑시키는 자, 해석 가능성과 윤리의 이름으로 글 뒤로 빠져 논쟁을 판단하는 자보다 윤리적으로 우월해지려고 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망자의 삶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그게 이 논쟁이 우리에게 남겨주는 질문이다. 가까운 후배이자 동료, 악플로 희생된 연예인, 페미니스트 실천가 등등... 망자의 삶은 어떤 언어로 규정하기에는 너무 크다. 그렇기에 우리는 규정하기에 앞서 추모하는 것이고 각자의 기억을 나누는 것이다. 그 와중에 기억을 둘러싼 투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 모두의 기억이 같지 않고 망자는 타자로써 늘 자신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위근우의 지적도 김희철의 분노도 망자를 전부 규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임지은씨는 그 뒤에서 그 둘을 자신의 담론에 따라 배치시키고 망자들을 언어 없는 자들로 규정하면서 바로 자신이 지적한 특권 가진 지식인의 반열에 오른다. 그것은 기억을 둘러싼 이 투쟁에서 가장 무의미한 일이다. 여기서 남는 것은 그가 설파하는 “함께 가는 윤리”밖에 없다. 그러나 그 윤리는 지식인인 필자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필자는 망자와 김희철(그리고 위근우까지)을 내려다보면서 함께 가고 있지 않다. 정작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논쟁 자체에 대한 “더 많은 해석 가능성”이다. 논쟁을 지식인에 의한 윤리적 폭력으로 단정짓는 것이 아니라, 망자들의 삶을 기억하는 방식에 대한 윤리가 어떻게 가능한지 이야기되어야 한다.
덧붙이며 - “그는 이제 위근우의 논리를 증명한 빼박 천박 한남 연예인이 되었고, 위근우의 위상은 더 올라갔다. 덕을 본 건 누구일까.” 적어도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임지은씨의 글과 그 반향이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