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영화: 뱅드림! 필름라이브, 블랙머니, 날씨의 아이, 82년생 김지영 잡상
아무 관련이 없는 네 영화를 고른 이유는 이 영화들을 최근에 순서대로 보았기 때문이다. 네 편 중 두 편은 애니메이션이고 두 편은 한국 실사영화이지만 모두 주제와 장르가 다르다. 사실 벌새 역시 보긴 하였지만 내가 차마 글로 다룰 수 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아직 벌새가 상영 중이니 꼭 한번 보시기를 권한다.
1. 뱅드림! 필름라이브
내가 이 영화를 보게 된 계기는 특별하다. 지난 1월 전역 후 일본을 방문했을 때, 첫 날 묵은 호텔에서 TV를 트는 순간, 뱅드림 성우들의 콘서트가 재방송되고 있었다. 충격적이었다. 이것은 애니메이션인가, 게임인가, 만화인가, 아니 근데 왜 성우들은 마치 실제 캐릭터처럼 분장하고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가. 그래서 게임을 시작했고, 흘러흘러 지금까지 왔다(부족한 실력이지만 25렙까지는 깰 수 있게 되었다). 기존의 창작물들은 본래 하나의 원본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미디어믹스로 애니메이션이라든지, 영화라든지, 소설이라든지, 만화라든지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뱅드림!은 하나의 설정을 바탕으로 애니메이션, 만화, (실사)콘서트, 게임, (애니메이션)콘서트 영화의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진다.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처럼 여기에는 원본이 없고 무수한 복사본들이 존재한다. 각 매체마다 세세한 차이가 존재하고, 그 차이는 수용자에게 또 다시 하나의 컨셉으로 받아들여져 2차 창작의 대상이 된다.
각 매체는 서로 중복되기도 한다. 뱅드림! 게임 내에는 네 컷 만화와 한 컷 만화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실제 앨범 발매나 애니메이션 상영 시에는 게임 내에 그 음악이 추가되기도 하고 아이템을 주기도 한다. 필름라이브 역시 현장에서 특전을 제공하고, 게임 내에서는 영화 상영 기념 아이템을 제공하고, 실제 존재하는 카페 내에 영화와 관련된 이벤트를 진행하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가상공간과 현실공간 사이를 분리해주는 벽이 지양되고 있다. 필름라이브에는 응원상영이 따로 있는데, 응원상영의 경우 마치 실제 콘서트를 보듯이 응원을 하며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이것을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될까? 콘서트에서의 응원이란 상호적인 것이다. 팬은 응원으로 자신의 열기를 전달하고 공연자는 팬들의 응원을 듣고 어떤 방식으로든 응답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그런 능동적인 매체가 아니고 주어진 영상을 틀어줄 뿐이다. 즉, 응원상영에서는 일방적인 행위가 마치 상호적인 것처럼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주체가 다른 주체에게 향하는 감정이 반성적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이 그대로 돌아오는 나르시시즘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된다.
정리하자면, 다중적 매체 속의 뱅드림!은 하나의 컨셉이다. 복사본의 향연은 2차 창작을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는 구조를 가진다. 뱅드림!은 현대 미디어의 한 부분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착각해서는 안된다. 원본이 없다는 것과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지양된다는 사실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몇 달전, 뱅드림!의 제작사에서 한 캐릭터의 가족에 남동생이 있다는 설정을 추가했다. 이 캐릭터는 같은 밴드 내에 동성커플링이 사실상 암묵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에 대해 제작사의 중진이 남동생이라는 설정에 섹슈얼한 의미가 없다는 식의 농담을 하면서 논란이 커졌다. 이는 일방적인 설정 변경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지만, 컨셉이 원본을 주장하며 원본 없는 복사본의 구조를 무너뜨리고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지각하게 했다는 점에서 강력한 반발을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2. 블랙머니
블랙머니는 론스타 사태를 각색하여 영화화한 것이다. 어쩌다 친구와 보게 되었는데, 서사는 전형적인 한국 영화였다. 내용은 의심스러운 회계 평가를 바탕으로 모 은행을 미국의 스타펀드에 헐값에 매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회계조작을 주도한 인물들은 의문의 죽음을 맞고, 죽은 인물의 유서로 인해 '가짜미투'에 몰린 양아치 검사가 진실을 파헤쳐간다는 것이다. 결말은 다음과 같다. 스타펀드 쪽 변호사는 검사와 같이 활동하며 진실을 밝히는 쪽으로 기울었지만, 자신의 정의를 이루기 위해 진실에 눈을 감고, 동료와 선배의 배신으로 자격을 박탈당한 검사가 사람들 앞에서 수사자료를 뿌리면서 진실을 밝힌다. 여기서 음모론(의문스러운 죽음과 '가짜미투')과 냉소주의(진실보다 이익을 추구하는 검사와 변호사)적인 현실인식이 강하게 드러난다. 반면에 검사는 비록 말은 거칠고 행동은 무법적일지라도 진실을 추구하고 진실을 위해 자신의 지위를 버린다는 점에서 영웅적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정치사회적 현실은 영화의 확장판이다. 부패한 검찰, 무능한 경찰, 답답한 정치권력과 음흉한 금융자본이 판을 친다. 영화 속 부장검사는 진실을 추구하는 듯 하다가 야합을 하고 진실을 묻는 모습인데, 이는 최근 조국사태와 관련한 검찰의 모습을 마치 일부러 풍자하는 듯 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안적 모습으로 영화가 제시하는 영웅은 지나치게 소박하달까, 조잡하다. 때로는 법과 권력을 거스르면서도 진실을 추구하고 마치 우리 이웃같이 친근해보이는 '개천용' 검사. 이런 영웅적 개인은 많은 대중들이 선망하고 열광하는 타입의 인물이다.
그러나 이런 영웅의 허구성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영화는 영화다. 윤석열 청장에 대한 믿음이 극심한 반발로 한번에 뒤집어지는 모습에서 볼 수 있는 냉소적 태도는 이런 영웅에 대한 믿음의 취약성을 보여준다. 영화에서는 내내 정치다운 정치가 나오지 않는다. 거기에는 사적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소수의 대화, 청와대 민정수석의 일방적인 지시, 검찰의 상명하복의 구조만이 나온다. 진실을 담아낼 이념도 해결을 위한 정치적인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눈여겨봐야하는 것은 영화가 말하지 않는 이런 부분이다. 진실을 담아낼 정치와 이념에 대한 추구만이 냉소주의와 영웅주의를 오가는 진자운동에서 우리를 꺼내줄 수 있을 것이다.
3. 날씨의 아이
날씨의 아이는 너의 이름은으로 대히트를 친 애니메이션 감독 신카이 마코토의 신작이다. 빛과 색감, 리얼리티를 중시하는 감독답게 영상적인 면에서 화려하다. 서사는 전작 너의 이름은과 비슷하다. 도쿄로 무작정 올라온 한 남자아이가 소녀가장인 한 여자아이와 만나 여자아이가 가진 비를 그치게 하는 능력으로 돈을 벌어 곤경을 빠져나오지만, 그 능력에는 저주가 따라서 쓸 때마다 몸이 점점 사라진다. 날씨 변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한여름 도쿄에 눈이 내리게 된다. 결국 여자아이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남자아이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여자아이를 잊고 화창한 여름 날씨를 되찾는다. 하지만 남자아이는 여자아이를 잊지 않고 반드시 찾아내고자 우여곡절 끝에 지상으로 되돌려오고, 그 결과로 도쿄 중심가가 물에 잠겨버리는 결말이다. 결말에 두 아이는 재앙에도 불구하고 재회하게 되어 기뻐한다.
먼저, 사라지는 아이에 대한 작품 경향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전작 너의 이름은에서도 혜성이 떨어지는 재앙 이후 마을사람들에 대해 모두가 잊어버리고 남자 주인공 마저 잊게 된다. 그리고 그 기억을 돌이켜 과거로 돌아가 마을을 구하는 플롯이다. 최근에 방영되었던 일본 애니메이션 '청춘 돼지 시리즈'의 첫 부분 역시 유명 연예인인 주인공이 서서히 사람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게 되고 남자 주인공의 사랑으로 다시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잊히는 것에 대한 공포라는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다. 유명인으로 살아가든, 시골 학생으로 살아가든, 소녀가장으로 도시에서 살아가든 현대 사회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리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들어있는 것이다. 물론 그 존재를 되찾아오는 수단은 신카이 마코토에게 있어서 '전통'(솔직하게 말하자면 영화 시작부터 도리이가 나와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과 '사랑'이다. 청춘 돼지 시리즈 역시 '사랑'이 구원의 수단이 되고 있다. 또 하나는 사라져가는 존재는 여성이라는 점이다.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도시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근근히 살고 있지만 사라지는 것은 여성이다. 이는 남자 주인공을 구원자로 그려내기 위한 것이 아닌가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못하겠다.
다음은 '미야자키 하야오를 잇는 감독' 소리를 듣는 신카이 마코토니만큼, 지브리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의 비교를 통해 둘의 차이를 찾아보려고 한다. 먼저 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현실과 가상이다. 둘 모두 사랑을 다루고 아이의 성장을 다룬다. 그러나 센과 치히로가 묘사하는 성장의 공간은 문 너머의 가상세계다. 마치 크고 나면 아이가 자신이 어렸을 때 느꼈던 낭만적 감각과 성장과정을 잊듯이, 치히로는 '통과의례'를 마치고 문 밖으로 나오면서 잊는다. 반면에 날씨의 아이에서 둘의 행동은 세계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친다. 둘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지지만, 그에 비해서 책임의식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책임은 오로지 하늘에 의해서 주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날씨의 아이에서는 운명과 신, 행동과 사랑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체가 없는 것처럼 보이고 굳이 '신비한 종교, 전통'을 불러와야했던 것이다. 날씨의 아이 주인공들은 그저 사랑했고 운명을 극복했을 뿐이다. 여기에 성장다운 성장은 볼 수 없다.
이런 점들에서 나는 날씨의 아이에 크게 좋은 점수를 주지 못할 것 같다. 두 번 연속 재난을 다루었다는 점도 조금 흥미로웠지만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다뤄보고 싶다.
4. 82년생 김지영
개봉 전부터 엄청난 온라인 테러를 겪은 이 영화는 다행히도 300만 관객을 채울 정도로 흥행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영상화하면서 오히려 더 섬세한 부분을 다룰 수 있었던 것 같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섬세하고 자극적이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극 중 정유미는 82년생 가정주부로 어린 딸과 남편 공유와 아파트에서 살아간다. 한국적인 가부장제 속에서 정유미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린다. 마치 빙의한 듯이 타인의 목소리로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작품 내내 사소해보이고 미묘한 차별들을 드러내는데, 가령 '착한 남편' 공유가 이런저런 방면에서 가사를 돕거나 편을 들어주더라도 전체적인 가부장제 구조 아래서는 그런 선량함으로 정유미가 겪는 고통을 해결해줄 수 없다. 끊임없이 시어머니 눈치를 보아야하고 친아버지로부터는 차별적인 발언을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다. 직장에서 진급은 느리고 남자동료들은 자신들끼리 음란물을 공유하곤 한다. 회사 화장실에는 몰카가 설치되어있고 아이는 맡길 곳이 없어 자기 일로 돌아가지도 못한다. 남편은 속 편하게 자식을 하나 더 낳자고 말한다.
은희경 소설 속에 나오는 중산층 여성의 삶처럼 여기서도 도시와 남성중심사회 속에서 이름 붙일 수 없는 병에 시달려 이야기는 파국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다행히(?) 영화는 점차 정유미가 자신의 삶을 되찾으려하는 희망적인 결말로 끝난다. 똑같은 중산층 여성과 가족의 삶을 그려도, 지상파 드라마는 안정적이고 화목한 가정을 그리거나 복잡한 사랑이나 돈 문제로 얽혀 고통받는 가정의 모습만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82년생 김지영은 리얼리즘 영화다. 남혐(?)영화라는 일각의 주장과 달리 영화는 너무나 차분하게 여성이 겪는 고통을 보여준다. 단지 똑같은 도시 중산층의 삶을 다르게 비췄을 뿐인데 낯설고 문제적이라고 느껴진다면 지금까지 우리 미디어가 보여준 가족과 여성의 삶이 얼마나 단조롭고 차별적인지만 드러낼 뿐이다.
영화 속 빙의는 흥미로운 요소 중 하나다. 엄마로 살면서 자기가 자기가 아니게 된 정유미는 다른 사람의 말을 빌려서 밖에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때문에 영화는 결말에서 직장으로 복귀할 준비를 하는 모습을 그린게 아닐까. 자신이 자신이게 하는 일을 통해서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는 것도 치료의 일환일 것이다.
끝으로 나는 이 영화를 엄마와 함께 보았다. 영화 속 가정은 우리 집을 붙여놓은 것 같았고, 가부장적인 정유미의 아버지는 대학까지 나온 딸에게 재산 한푼 물려주지 않고 시집보내 가정주부로 살게 한 외할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영화를 똑바로 보았다면, 누가 이 영화를 단지 픽션이라고 얕잡아볼 것이며 누가 극단적이고 혐오를 담은 영화라고 할 것인가. 영화 속 비극이 앞으로 한층 한심하게 되풀이될 모습을 생각하면 그저 슬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