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언론을 통해 한국의 사회적 갈등이 극에 달했다는 표현들을 보게 된다. 온라인 상의 여론이나 언론들이 전하는 사실만 접하면 한국은 이미 내전적 상황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일상에서 우리는 갈등보다 철저히 갈등이 억제된 세상을 접하게 된다. 노골적인 갈등과 적대보다 한숨과 불평, 인내와 억압이 더 익숙한 모습이다. 물론 갈등이 더 높은 차원에서, 의회정치나 담론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가끔 범죄적으로 돌출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갈등이 일상화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BLM 시위에서 볼 수 있는 미국의 인종갈등이나 노란조끼 시위에서 드러난 프랑스의 계급갈등에 비하면 한국은 상당히 조용한 나라로 보인다. 그렇다면 한국은 갈등이 적은 사회인걸까?
한국 사회의 갈등의 특징은 갈등이 인종주의적이라는 것이다. 인종주의라는 용어 사용이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인구의 거의 대부분이 에스닉 코리안인 사회에서 인종주의라고? 그러나 사회심리학자 알베르 멤미에 따르면, 인종주의는 협의의 생물학적 차이에 대한 배타성에서 광의의 모든 차이에 대한 배타성, 폄훼 그리고 이에 따른 만족감을 느끼는 것으로 정의된다. 즉, 인간 사이의 차이를 절대시하고 이를 통해 타자를 폄훼하고 우월감을 느끼는 모든 담론이 인종주의라고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의 갈등은 인종주의화한다. 타자와 우리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차이가 있으며, 같이 공존할 수 없다고 여긴다. 부동산 문제로 갈등을 겪는 은마아파트의 소유자 대표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 이재성> 일단 임대아파트가 많이 들어오게 되면 임대아파트 단지로 알고 있기 때문에 뭐 집값도 나가지 않을 거고요. 그리고 뭐 학교 내에서도 그 단지에 산다고 한다면 차별화돼 있을 거고 그런 부분들이 가장 힘든 거죠.
◇ 김현정> 그러면 소위 말하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서로 피해다, 이 말씀이신 거예요?
◆ 이재성> 그렇습니다.
◇ 김현정> 임대 아파트 사시는 분들도 피해다?
◆ 이재성> 네, 그렇습니다. 어느 한쪽이 아니고요. 비슷하게 살아야지 마음 편하게 살지 않습니까?(CBS 김현정의 뉴스쇼 2020.08.06)
다른 경우를 보자. 최근 논란이 되었던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 정규직화 논란에서도 비슷한 것을 볼 수 있다. 정규직화를 반대하는 담론들에 따르면, 정규직이 갖춘 능력과 비정규직이 갖춘 능력 사이에는 공존 불가능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것이 시험으로 드러나는 것이고, 시험을 거치지 않은 모든 정규직화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 협의의 인종주의가 적용될 수 있는 다른 경우도 있다. 코로나 초기에 중국인, 조선족에 대해 벌어진 대규모의 차별 행위들이 그렇다. 한국인이나 중국인이나 조선족이나 바이러스에 걸릴 확률은 같고, 중국 전역에 퍼지지 않은 상황에서 무분별한 입국금지 청원과 중국인, 조선족 집단 거주구역에 대한 비난과 마타도어가 넘쳐났다. 여기서는 어떤 차이에 대한 감각, 비록 가시적이지는 않지만 국적에 따른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는 믿음을 느낄 수 있다.
한국의 인종주의적 담론의 특징은 사회를 격자화한다는 것이다. 갈등이 벌어지기 이전에 이미 담론적으로 '두 인종'이 갈라져있다. 많은 갈등은 즉자-대자적이다. 먼저 불편과 충돌을 겪고, 그것을 통해서 대자적 자기인식을 얻어 마침내 (계급적)갈등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화된, 인종주의적 갈등은 즉각 높은 차원으로 올라간다. 충돌 이전에 먼저 타자를 배제하고 자기인식을 얻는다. 타자는 피억압자로써 자기인식을 얻지 못하고 한숨을 쉬고 불평을 하는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분리는 담론적 분리일 뿐만 아니라 시간적, 공간적 분리이기도 하다. 같은 단지에서 임대아파트 거주자는 놀이터를 사용할 수 없게 하는 아파트라든지, 비정규직은 화장실 사용시간을 규제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같은 인종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시간과 공간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이 갈등은 외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화된 갈등은 기울어져있다. 차별하는 쪽에서는 타자를 규정하고 배제하고 자기인식을 통해서 당당하게 주체화하지만, 차별당하는 쪽에서는 자기인식을 얻기도 전에 모든 충돌의 가능성을 배제되어 파편화되어있을 뿐이다. 세입자들은 아파트를 욕망하고, 비정규직은 정규직을 욕망한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를 한탄하거나, 주어진 사회 속에서 어떻게든 상승하려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갈등을 다시 감각적 차원으로 끌어내려야 한다. 실제적 갈등에 대한 회피를 박살내야 한다.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재분배된 시간과 공간들을 뒤섞고 갈등의 장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억압받는 자들이 스스로를 인식하고 단련하고 자각할 수 있다. 소셜믹스가 갈등을 빚어낸다는 지배계급의 우는 소리는 전적으로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그들이 갈등을 겪어본 적이 없다는 전제 아래서 말이다. 그리고 갈등을 견디고 구축된 사회는 이전보다 더 평등할 것이고, 격자화된 사회보다 더 단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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