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의 죽음으로부터 벌써 며칠이 지났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일이었고, 그 원인인 성추행 사건은 정말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는 무책임한 죽음을 선택했다. 그가 고발을 접하고 느꼈을 고통, 괴로움, 혼란의 감정만큼이나 배신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에 비할 바 없는 피해자가 겪었을 외로움과 고통, 혼란을 감히 헤아려본다. 누군가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를 애도해야 한다고, 비난은 그 이후의 일이라고 말한다. 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차마 애도할 수가 없다. 언젠가 그를 위해 안타까움의 마음을 가질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 상실감을 느끼는 것은 인간 박원순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시대적 '지식인'들 전반 자체이다.
한 지식인은 추모를 거부하는 것을 두고 인간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에게는 망자를 기리는 것이 인간적이라고 생각되겠지만, 나에게는 피해자의 편에 서는 것이 인간적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간성이라는 개념은 절대 단순하지 않다. 그가 인간이니만큼 추모 거부에 거부감을 느꼈듯이, 나도 인간이니만큼 성추행범의 명복을 빌기 어렵다. 추모도 거부도 씁쓸한 마음없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불완전성이다.
어떤 지식인은 추모 거부를 두고 '순수에의 열망'이라며 도덕적 순수성에 대한 열망이 파시즘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우려했다. 이런 우려는 '극단적 중도주의'만이 살아남은 우리 시대에 매우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극단적 중도주의는 모든 광신적 열망을 위험한 것으로 처리하고 '전체주의론'의 주장처럼 파시즘, 공산주의 같은 사상을 위험사상으로 단정짓는다. 그러나 자코뱅적 전통에서 이어져오는 '순수에의 열망'은 단순히 파시즘이나 공산주의를 탄생시킨 위험한 생각으로 치부할 수 없다. 그러한 광적인 열망 없이 우리가 사건 이전과 이후를 나눌 수 있을까? 순수에의 열망은 독이면서 치료제인 파르마콘이다. 우리는 사건 이후로 나아가기 위해 그 극단주의적 위험성을 감수하고서라도 순수에의 열망을 가져야 한다. 어떤 정치인은 추모는 인간적인 도리라고 말했다. 순수에의 열망은 그 '도리'를 기각하고 피해자의 편에 서려는 것이다. 한 시대의 인식이 추모를 도리로 여겼다면, 추모 거부는 그 시대와의 인식론적 단절을 의미한다. 순수에의 열망은 단절을 향한 몸부림이다.
어떤 정치인들은 그의 공적 업적이 유지되어야 하며, 그의 가해가 사적 영역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지나치게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이다. 여성은 사적 영역에서 일하고 성폭력은 사적인 영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박원순은 서울특별시장이라는 자신의 거부할 수 없는 위력을 가진 지위를 이용해서 성추행을 벌였다. 안희정의 범죄도 그렇고 이러한 범죄는 사적인 영역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으로 여겨졌던 것을 정치적으로 활성화시키며 공적인 것으로 끌어온다. 이것 또한 인권변호사 박원순의 유산 중 일부이기도 하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박원순이 남긴 유산들을 누리게 될 때도 있을 것이다. (잠깐 첨언하자만, 그러한 유산은 그만의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한 모든 활동가, 공무원, 지지자, 정치인들의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끝까지 순수할 수 없으며 완전히 단절될 수 없다. 우리는 오염된 유산을 손에 쥐고 살아가는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순수를 향한 몸부림은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며 우리를 이전처럼 세상을 받아들이고 사고할 수 없게 만든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런 것이다. 정의당의 류호정, 장혜영 의원이 던진 추모 거부의 몸짓은 우리 사회에 하나의 전선을 가져왔다. 죽은 자는 어떤 자이든 간에 추모해야 한다는 정언명령적인 전통에 아직 외로울 피해자의 편에 선다는 결단을 통해 균열을 만들어냈다. 감수성 없는 사회에 감수성을 폭력적으로 각인시킨 것이다. 만약 모두가 추모열기에 휩쓸렸다면 피해자는 어떤 마음이 들었겠는가. 나는 혼자이고, 모두 가해자의 편을 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이런 폭력은 곧 폭력적 사회에 맞서는 반폭력의 정치가 된다.
어떤 이들은 모든 애도를 금지하자는 것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류, 장 두 의원이 그랬듯이 둘은 양립불가능한게 아니다. 추모하고 싶다면 추모하면 된다. 다만, 피해자의 편에 서기 위해 추모하지 않겠다는 자들을 몰염치하고 비인간적인 사람 취급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피해자의 보호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가해자에 대한 공적 애도를 통해 피해자를 위축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애도는 정치적인 행위이다. 어떤 사람을 어떤 식으로 애도하는가는 그 사람의 위치, 지위, 관계를 드러내준다. 어떤 형태의 장례를 치르는지, 누가 애도하는지, 어디에 묻히는지 모두 죽은 자와 산 자를 둘러싼 정치를 구성한다.
나는 그를 애도할 수 없다. 그의 황망한 죽음 앞에서 인권변호사 박원순의 유산과 서울시장 박원순의 죄업을 받아들여야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를 쉽게 애도하고 떠나보내기에는 지금 그의 책임을 물어야 할 많은 일들이 남아있다.
'정치적 글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코로나19 주저리 주저리 (0) | 2020.08.02 |
---|---|
촛불항쟁의 의식과 과제 (0) | 2020.07.31 |
정의기억연대를 위한 변명과 우익운동의 전략 (2) | 2020.05.12 |
나의 폭력론 1 (0) | 2020.05.02 |
코로나 중국 책임론, 유럽 난민사태, 근대적 주권론과 초국적 책임 (0) | 2020.04.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