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 한국에 오랫동안 외교관으로 지냈다가 미국에서 한국학, 국제연구 연구자로 활동했던 그레고리 헨더슨은 한국정치에 대해 연구한 저작 <소용돌이의 한국정치>에서 한국정치의 특징을 '소용돌이'로 묘사했다. 한국의 정치환경이 전근대 시기부터 원자화된 개인이 중간매개집단 없이 강한 상승기류에 따라 중앙의 권력으로 집중되는 모습을 소용돌이에 빗댄 것이다. 그의 이런 분석에 따르자면 한국에는 전통적으로 두터운 전문집단이나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권력을 향한 상승열기 속에 시민사회가 단단히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정치 구도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다. 공고한 양당제 속에서 당선을 위해서라면 당을 가리지 않는 '철새'의 존재나, 특별한 정책적, 정치적 일관성을 가지지 않는, 다만 적대적인 상대 당의 존재 속에서만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양당의 현실에서 그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그레고리 헨더슨이 지적하지 않은 한 가지 특징을 더 하자면, <민주화 없는 민주주의>에서 최장집이 지적한대로 분단체제의 형성 속에서 남한 사회의 진보적, 좌파적 정치세력이 거의 완전히 배제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조건 속에서 한국의 노동운동, 사회운동가들은 민주화 투쟁과 연계하여 80년대 내내 진보적 사회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백기완 대통령 후보 선거운동과 민중당(현 민중당과는 동명이당)을 낳았다. 성적표만 보면 처참했지만 이후 87년 노동운동의 대폭발로 결집한 노동운동의 지지 속에서 건설 국민승리21이 97년 대선을 위해 출범했다. 그리고 그 성과를 기반으로 민주노동당이 결성되어 국회의원까지 당선시켰다. 이는 양당 구도 속에서 제 3의 공간을 열어젖힌 것이었다. 또한 강력한 노동조합이라는 중간매개집단을 통해 단순한 출세주의가 아니라 명확한 정치적 목표를 이루고자 했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농민을 대표하는 정당으로 10% 정도의 지지를 얻어 기성의 구도를 깨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이 정파적 갈등으로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으로 나뉘면서 중간매개집단인 노조에도 균열이 생겼고 이합집산을 통해 통합진보당이 탄생했다. 통합진보당은 민주당에서 떨어져나온 국민참여당이 함께하면서 성향이 옅어졌고,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기보다 정파연합을 통해 국회의석 확보에 주력했다.
진보정당운동은 한 때 양당 구도에 균열을 일으켰고, 의회활동을 통해서 노동법 개악, 한미FTA 같은 노동계급과 농민의 이익을 해치는 의제에 대해 반대를 표명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87년 이후로 축적된 시민사회운동의 동력, 노동운동의 지지가 민주노동당과 유기적으로 연계되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이 분당하면서 역설적으로 시민사회운동과 노동운동이 타격을 입었고, 정파연합이었던 통합진보당은 한국의 소용돌이 구조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기대는 것이었다. 결국 통합진보당은 붕괴되었고 잔존세력은 분단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지배집단의 목적 때문에 해산되어 완전히 정치적으로 파산하고 말았다. 다른 잔존세력인 정의당은 다시 더 왼쪽에 있는 노동당이 소용돌이 구조 속에서 해체되는 것을 주워담아 가까스로 자리를 잡았다. 더 왼쪽에 있는 세력들은 간신히 정당의 형태만을 유지하거나 정당조차 결성하지 못했다. 이번 총선에서 이른바 '위성정당 사태' 속에서 녹색당, 기본소득당, 민중당, 미래당 등이 민주당의 구심력에 휩쓸려 정치적으로 파산하거나 흡수되었다. 2016년부터 2018년 사이 촛불과 남북협상은 다당제의 가능성과 분단체제의 금기를 깰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진보정당운동은 날로 해체의 길을 걷고 있는 것 같다.
진보정당운동의 기축 역할을 하던 노동운동은 점차 관성화, 관료화되었고, 활동가를 보충해주던 학생운동은 대학가에서 씨가 말라버렸다. 87년 세대의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그 세대가 대표했던 가치들을 이어받고 발전시킬 주체들의 형성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반면 위기는 증가하고 있다. 청년세대의 보수화는 심각해지고 있고, 양당은 나름대로 이런 현황을 대변하려고 하고 있다. 노동운동은 비정규직과 정규직 간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 사회적 가치관의 변화로 다층적인 요구가 담긴 '공정'담론이 떠오르고 있지만 현재 진보정당운동은 이러한 흐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다가오는 21대 총선은 기회가 아니라 재앙처럼 보인다.
그레고리 헨더슨은 <소용돌이의 한국정치>의 마지막 장에서 한국의 여러가지 가능성이 있는 집단들을 검토하는데, 그 중 하나로 해방정국에 가장 성공적으로 조직되고 활동한 정당으로 조선공산당, 남조선노동당을 거론한다. 이들은 강력한 뿌리 조직을 기반으로 명확한 가치를 가지고 활동했다. 지역에서는 인민위원회를 장악해 통치능력을 보여주었고 다양한 외곽단체를 통해 원자화된 개인들을 묶어냈다. 비록 분단체제의 성립으로 남로당은 붕괴했지만 이들의 성과는 한국에서 진보적 정치세력이 성공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는 하나의 선례가 될 수 있다.
진보정당운동이 한국적 구도를 거슬러 새로운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확고한 가치를 세워야한다.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조직화를 통해 중간매개집단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과거 노동조합이 했던 역할처럼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못하는 존재들을 조직화하고 이들의 이익을 대변해야만 한다. 충분히 정당이 추구하는 가치를 학습하고 체득한 활동가들을 양성해내야 한다. 당장의 권력에 가까워지는 길, 즉 국회의원 당선에 목맬 것이 아니라 충분히 숙련된 정당을 구성해야한다. 양당이 버티고 있는 중앙의 구심력 속에서 진보정당운동이 완전히 해체되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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