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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글쓰기

'N번방'의 온라인 세대와 새로운 윤리의 필요성

by 비내리는날 2020. 3. 29.

 너무나도 끔찍한 범죄가 벌어졌다. 여기서 그 범죄의 내용을 굳이 재론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텔레그램이라는 보안성이 높은 메신저를 이용해 여성들을 협박해 영상과 사진을 유포하는 성착취 범죄가 벌어졌고, 이용자들은 역시 보안성이 높은 암호화폐를 이용해 그 댓가를 지불하고 영상과 사진을 공유했다는 것이 범죄의 주요 내용이다. 주범인 N번방의 운영자 '박사' 조주빈과 일부 공범들은 체포되었지만 여전히 비슷한 텔레그램 방과 이용자가 존재하며 범죄수익이 환수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범죄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렇다면 이 범죄가 이전 범죄와 다른 점은 무엇이며, 이 사건으로 우리 사회에 필요하게 된 것은 무엇인가? 먼저, 범죄의 철저한 익명성, 탈중심화를 눈여겨봐야한다. 이전 세대의 조직범죄와는 다르게 이 범죄는 면식이 있는 사람들 간의 조직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범 조주빈과 공범들은 면식이 없었다고 하며 오직 텔레그램 네트워크를 통해서만 범죄 내용을 논의했다고 한다. 한편, 피해자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피해자를 직접 맞댄 상태에서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영상, 사진 같은 디지털 자료를 협박 수단으로 활용하며 온라인 상에서(혹은 자신들의 범죄 네트워크를 통해서) 수집한 개인정보를 활용해서 범죄 수단으로 사용했다. 이용자들은 범죄의 결과물을 텔레그램 방을 통해서 공유받으며 댓가를 가상화폐로 지불했다. 

 즉, 범행의 모든 과정이 탈중심화되어있고, 인간적인 대면관계가 아니라 익명성을 통한 '날 것의 관계'가 주를 이룬다. 범죄의 과정은 피해자를 제외한 모든 참가자에게 분산되어있고, '박사'뿐만 아니라 많은 공범들이 방을 운영하는 주체가 되고 있다. 이용자들은 받은 영상과 사진을 재배포하며 다시 범죄의 주체가 되고 있다. 모든 과정이 온라인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여기서 가상-현실의 관계는 간접화되어있다. 이용자들은 이것이 가상 네트워크를 이용한 것이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며 쉽게 범죄에 참여하지만, 동시에 피해자를 착취하는 과정에서는 상대가 실제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성적, 폭력적 욕망을 채우고 있다. 여기서는 가상과 현실이 상호침투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익명성을 통한 '날 것의 관계'는 점차 인간 관계의 주를 이루게 되고 있다. 조주빈이 그랬던 것처럼 많은 이들이 실제 세계에서 낯선 이를 만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지만, 익명성과 간접성을 부여해주는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해서는 '날 것'의 자신과 자신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이를 온라인 시대의 윤리로 만들어가고 있다. 최근에 논란이 되는 '위선'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 온라인 세대가 만들어낸 '날 것의 관계'에서 자신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새로운 남성성의 기준이다. 반면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던 면 대 면의 인간관계를 맺는 법, 거리를 두고 가면을 쓴 채로 서서히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은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위선적인 관계맺음 취급을 당한다. 관계는 익명성을 통해 투명해진다. 일반적인 인간관계가 만들어내는 서열과 우위는 온라인이 만들어내는 관계 속에서는 변형된다. 누구든 욕망을 채워주기만 하면, 어떤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든 우위에 선다. 이것이 온라인 사회 속의 탈중심화된 평등한 '능력주의'이다.

 

 낡은 윤리는 이런 상황에 점차 적응해가는 청년 세대, 특히 청년 남성들에게 위선으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N번방 같은 끔찍한 범죄를 막기 위해서, 그러한 토양부터 갈아엎기 위해서는 온라인 세대를 만들어낸 환경과 그 환경이 만든 새로운 윤리관을 비판적으로 성찰해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새로운 환경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윤리관을 구축해야만한다. 익명화되고 탈중심화되었으며 간접화된 세계에서 주체들이 윤리적 책임을 받아들이며, 가상-현실의 상호침투 속에서 가상이 현실을 연결해주는 인터페이스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윤리관의 정립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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