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글쓰기

일본상품 불매운동으로 본 탈정치 시대의 정치

비내리는날 2019. 10. 24. 01:51

 지난 7월 1일, 일본은 수출품목의 부당 유출 등을 핑계로 반도체 핵심부품소재에 대한 수출규제를 실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1월에 있던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미쓰비시 강제징용 배상판결에 대한 보복조치였다. 이에 따라 7월부터 각지에서 민간의 자발적인 일본제품, 브랜드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유니클로 등의 브랜드들이 큰 타격을 입었고 일본 각지의 관광지도 방문객이 크게 줄었다. 이런 불매운동을 두고 이것이 사실상 강요가 아닌가, 외교문제를 단순하게 치부한다는 비판이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민들이 불매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가했다.

 

 불매운동이라는 방식은 이전에도 매일유업의 갑질사태나 옥시 가습기 살균제 사건, 각종 여성혐오기업에 대한 불매 등에서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참여가 쉽고 책임주체가 개개인이기 때문에 부담이 적다는 점이 참여도가 높은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불매운동은 시위, 파업, 서명운동처럼 대의제 하에서 정치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시민들이 쓸 수 있는 투쟁방식으로 자리잡았다. 투쟁방식으로써 불매운동의 특징은 그것이 소비사회에 적당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정치적 문제를 두고 투쟁주체는 소비자로서 관련 기업이나 상품을 불매하거나 거꾸로 특정 기업이나 상품을 구매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특히 지금 같은 탈정치의 시대, 이념이 죽은 시대에 불매운동은 방식 자체가 어떤 이념적 함의를 담고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투쟁방식에 비해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일본상품 불매운동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정치'의 개입을 집요하게 거부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공공기관의 역할과 민간의 역할의 구분이라는 부분도 작용했지만, 정치세력이나 특정 단체가 주도하는게 아니라 시민들의 자발적인 운동이어야한다는 공감대가 컸다. 이는 탈정치 시대의 정치적 효력이 순수성, 진정성을 통한 숭고함의 수준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순수성, 진정성으로 보장된 수단과 그 목적인 정치적 해결이 충돌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수출규제와 그 너머에 있는 제국주의적 인식에 대한 비판의 표명이라는 점에서 불매의 목적은 정치적이다. 동시에 불매운동은 정치적 순수성으로 스스로를 지탱하고 있기 때문에 대의제 내의 정치의 관여나 시민단체 조직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즉, 탈정치 시대의 정치로써 불매운동은 대표적인 정치적 표현행위이면서 스스로 정치를 금지해야만하는 자가당착적인 방식이라는 것이다.

 

 물론 두 '정치' 사이의 층위가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로 총칭되는 행위에 대해 제한이 걸려있다는 점에서 서로 발목을 붙잡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불매운동은 순수로의 운동을 계속하면서 투명한 수단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누가 불매를 하지 않는지, 어떤 것까지가 불매 대상인지, 어떤 상품을 쓰는 것이 위선인지를 따지게 되고 정치적인 메시지는 뒤로 사라진다. 여기서 불매는 하나의 게임이자 밈인 셈이다. 불매운동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고 일본 측이 입은 손실은 계속 늘어나고 있지만 이것이 수면 밑으로 가라앉고 정치적으로 변수가 아니라 상수로 처리된 것도 그런 속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탈정치 시대에 모순없이 스스로 정치성을 담보할 수 있을까. 하나의 제안은 수단의 순수성이 아니라 목적의 자기의식적 진실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불매를 비롯한 다른 수단들로도 정치적 목적에서 하나된다면 폭넓게 이용되어야한다. 그리고 일본 수출규제 문제에 있어서는 불매의 목적, 즉 식민지배와 그 이후의 문제들, 켜켜이 쌓인 역사 속 침묵의 강요와 억압들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현재 속으로 끌어들여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