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기, 그럼에도
버티기
평소에는 그렇게 빠르게 흐르던 시간도 간절한 ‘기다림' 앞에서는 멈춰버린다. “기다림은 즐겁고 그 공기마저 달콤해”라는 가사도 있지만, 많은 경우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은 지루하고 힘든 일이다. 가령 20분 후에 도착한다는 버스를 기다리는 일을 생각해보자. 20분을 기다려야한다는 것 자체도 큰 곤욕이지만, 춥거나 더운 바깥의 날씨, 내 앞에서 끊겨버릴 것 같은 대기줄은 모두에게 큰 스트레스이다. 누군가는 기다림의 여유를 즐기라 하지만 '수양'이 부족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 말은 공중을 떠도는 좋은 말에 불과하다.
무언가를 기다려야한다는 것은 시간의 속도가 달라서이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고유한 시간의 흐름이 있다. 절대적인 1초, 1분라는 시간도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는 것을 누군가는 좋은 말로 '인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버티기'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것 같다.
가끔 사람들은 시간의 차이에서 서러움을 느낀다. 세월호 진상규명을 외칠 때에 아직도 그러고 있느냐는 반응, 성소수자의 인권을 말할 때에 나중에라는 대답, 부당한 해고로 생계의 위협을 받을 때에 기다리리는 말들. 이러한 시간의 차이에사 큰 벽을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상대적 차이를 온전히 개인이 견뎌야하는 것에서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궂는 날씨에 버스를 기다리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무언가에서 버티고 있는 것, 견디는 것은 너무나도 한 명의 평범한 사람에게 고통스러운 일이다. 기껏 버티고 났더니 그 결과가 사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51이라는 숫자를 좋아한다. 선거에서 후보가 몇명이든, 몇등까지 당선이든 51%를 얻으면 당선이다. 지금은 대통령이 된 문재인은 2012년 대선에서 48%의 득표율로 낙선했다. 반면 박근혜는 51%를 얻어 당선되었다.
일단 51%를 확보하면 그 다음부터 60%, 70%가 되는 일은 51%를 만드는 것보다는 쉬운 일일 것이다. 더 큰 도약의 발판이 되는 51이라는 숫자의 매력이 이것이다. 48%와 51%의 차이. 3%의 차이는 미미해보이나 그만큼 크다. 48%를 51%로 만드는 일은 3%는 3%의 후보를 6%, 10%로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이 3%를 획득하는 것. 그것은 속도의 차이를 잘 극복하는 것에서 올 수밖에 없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누군가는 투항하기도 할 것이고, 적과 손을 잡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3%를 확보하기 위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더 많은 기다림, 더 진한 설득과 다가감 뿐이다. 이것이 ‘저들'과 ‘우리'의 차이이기도 하다.
요즘 주변에 ‘그럼에도'라는 말을 참 많이 한다. 이는 기다림의 의지적 표현이기도 하다. 하지만 반대로 “으악, 옳은 일이지만 그럼에도 더이상 버틸 수 없어”라는 표현이기도 하다. 분명 그럼에도 이 힘든 기다림의 길을 버텨나갈 것이다. 지금의 미미한 확률이, 지지율이 48%와 같은 안타까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기에, 그리고 언젠가는 51%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기에. 오늘도 미미한 확률에 시간을 던지고, 시간의 차이를 버티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