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글쓰기

선거라는 의례에 대하여

비내리는날 2018. 6. 9. 02:42

 조금 황당한 상상을 해보고 싶다. 머나먼 미래에 인류가 종말을 맞고, (다분히 인간 기준에서의)지성을 갖추게 된 고양이들이 세상을 차지하게 됐다고 생각해보자. 그들이 보기에 현대의 정치체제, 그 중에서도 선거라는 제도는 어떻게 보일까. 인류학적 시각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다분히 '미개'해보이는 제도들도 시간과 공간에 따라 충분히 합리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미래의 고양이들이 보기에도 현대의 선거는 '미개'할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에게는 선거라는 제도는 합리적이고, 일정한 한계는 있지만 정당해보인다. 그러나 한번쯤은 미래의 고양이의 시점에서 선거를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선거를 낯설게 보는 것이다.


 오늘날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 선거는 핵심적인 요소다. 선거는 개개인의 투표행위로 누군가를 선출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투표라는 개개인의 행위로 국민(정확히는 인민)의 정치적인 의사를 수량적으로 파악하고 대의자를 선출한다. 여기서 국민(인민)은 평소에는 추상적으로만 존재한다. 대의자들은 국민의 이름으로 통치하지만, 그 국민은 실체를 가지고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파편적인 개인으로만 존재한다. 오로지 4년, 5년에 한번씩 있는 투표행위를 통해 개인들은 '국민'이라는 정치적인 실체로 형성됨과 동시에 주권을 대의자들에게 위임하고 다시 개인으로 돌아간다. 이는 시간순에 따른 현상이 아니라 아니라 투표에 응축되어있는 동시적인 현상이다. 또한 선거는 근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능한 정치적 의사표현 행위들 중에 유일하게 제도적으로 권력을 창출하고 보장한다. 가령 집회, 시위나 언론을 통한 의사표현은 헌법적으로 보장되지만 그것 자체로 제도에 따라 권력을 창출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말 그대로 의사를 표현하거나 정치인들에게 압력을 가할 뿐이다. 집회나 시위로 권력을 직접 창출하는 거의 유일한 경우는 혁명인데, 혁명은 구 제도의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에 제도적이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오직 구 제도를 파괴하고 (아마도) 새로운 제도의 정초가 될 뿐이다.


 선거는 이전 시대 권력에 관한 많은 주술적인 의례들이 그랬듯이 신이 죽은 시대에 주권자의 자리를 차지한 국민(인민)을 제도적으로 창출하기 위한 의례다. 인간 개체는 균질하지 않고 다양한 조건들에 따라 각기 다른 의사를 표현한다. 선거는 이러한 개체들을 투표행위를 통해 단일한 정치적 실체로서의 '국민'을 창출함과 동시에 그러한 '국민'의 의사를 반영한다. 한편 선거는 늘 특정한 형식이기 때문에 국민의 의사를 제한한다. 이는 마치 인간에게 언어가 의사표현 수단임과 동시에 사유를 제한하는 조건인 점과 유사하다.


 오늘날 한국에서의 선거는 어떤 특성을 가질까. 한국에서 선거는 좀 더 축제적이면서 자본주의적이다. 정당정치가 협소한 한국에서는 정당과 정책보다 양질의 '상품'으로서의 후보자를 강조하며, 그 상품을 소비자로서의 유권자에게 팔기 위해 각종 유행가를 틀며 춤추고 광고지를 뿌리듯이 선거전단을 뿌려댄다. 유권자들은 '될놈'에게 '정치효능감'에 따라 투표(소비)한다. 군소정당이나 후보들은 그 이상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당선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상품성' 없다. 선거 외적인 의사표현들, 특히 시위 같은 행위들은 늘 질서를 위협한다. 이러한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선거는 축제적인 성격을 지닌다. 열광적인 선전과 홍보, 스캔들, 비난과 옹호들이 축제로서의 선거를 구성한다. 축제로서의 선거는 마치 중세의 카니발이나 샤리바리같은 의례들이 공동체 내부에 쌓인 불만과 갈등의 에너지를 축제적으로 발산시킨 후에 질서로 돌아가듯이, 정치적 불만을 소모시켜 질서를 수호함과 동시에 이를 질서 내로 반영한다.


 선거에 대한 이런 비판적인 탐색이 선거의 유효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선거는 제도 내에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몇 안되는 방법이다. 또 선거 제도 개혁을 통해 선거가 가지는 부정적 특징들을 줄여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선거가 유일하게 가능한 정치적 행동이라거나, 선거 외의 모든 방법을 부정하는 일부의 사람들에게 선거에 대해 비판적으로 탐색해보는 것은 다른 가능성들을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줄 것이다. 한가지 가능성은 선거라는 제도를 인정하면서도, 선거를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해보는 것이다. 선거는 아니지만, 의회 제도에 대한 러시아의 혁명가 정당 볼셰비키의 냉소적인 태도는 선거에 대해서도 고려해볼만 하다. <볼셰비키는 어떻게 의회를 활용했는가>에서 전직 두마(의회)의원이자 고참 볼셰비키였던 A.바다예프는 볼셰비키가 선거와 전제정부의 의회에 대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왜 거기에 참여했는지를 논한다. 볼셰비키들은 의회를 일종의 선전장으로 활용하고 전제정부를 비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함으로서 노동자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결집시킬 수 있었다.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볼셰비키처럼 해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제도를 의도된 용도 외의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한 상상력이 지금 필요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