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사랑'의 문제에 대하여
이제는 전역한 친한 선임이 한창 연애하고 싶다고 징징댄 적이 있었다. "어차피 곧 전역하는데 하면 되잖아?"라고 물어봤더니, 연애는 하고 싶지만, 사람에 신경쓰기도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하기도 싫단다. "그러면 너는 연애가 아니라 그냥 같이 뭔가 할 상대가 필요한거 아냐?". "어, 딱 그거다, 그냥 같이 꽃구경가고 데이트하고 할 상대가 필요한데 깊게 신경쓰고 싶진 않아." 이것이 오늘날 '사랑'이 처한 현실이다. 막연히 누군가 만나고 싶다. 하지만 신경쓰기도, 관계를 깊게 유지하고 싶지도 않다.
오늘날 결혼이 처한 처지는 어떤가. 평균 결혼 연령은 이미 30세를 넘어섰다. 결혼에 대한 인식을 묻는 조사에서 2010년에 비해 2016년에 남녀 모두 10% 이상 떨어졌다. 결혼은 기피되기도 하고 실제로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 삶 속에서 결혼에 대한 압력은 여전하다. 여전히 명절에는 결혼에 대한 질문은 진학, 취업과 함께 단골로 등장한다. 대책이랍시고 나오는 것은 어떻게 결혼율(과 이어지는 출산율을) 정상화시킬지를 목표로 두고 있다.
그에 비해 전보다 훨씬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섹스다. 강력한 성 엄숙주의 아래서 섹스는 억압의 대상이었지만, 자유화(와 자본화)의 물결 속에서 점차 섹스는 자유롭게 말해지고 추구되고 있다. 아니, 오히려 모든 것이 섹스로 수렴하고 있다. 많은 대화, 만남, 연애가 섹스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군대에서 만난 많은 남성들이 사랑의 최후 목표로 삼는 것이 바로 섹스였다. 귀찮은 연애 따위보다 원나잇이나 심지어는 성구매가 더 나은 것으로 얘기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사랑은 무엇인가? 분명히 사랑은 많은 이들이 추구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모든 사회적 대립에 사랑을 쑤셔넣어 타협을 종용하기도 한다. 연애만능주의 역시 끝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연애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랑하고 싶다거나, 연애하고 싶다는 말은 좀 더 검토되어야한다. 대상을 특정하지 않은 사랑 혹은 연애는 가능한가? 사랑은 어떤 구체적인 대상(타자)에 대한 감정이 아닌가? 그렇다면, 막연히 연애하고 싶다거나 사랑하고 싶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연애하는 나, 사랑하는 나, '무언가를 사랑하는 나'에 대한 사랑인 셈이다. 그렇게 시끄럽게 얘기하곤 하는 사랑들은 대체로 나르시시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에 형성된 사회적 기초들에서 사랑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결혼-사랑-섹스의 삼각 구도를 조절하는 것은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필수적이었다. 일부일처제, 연애결혼, 핵가족, '가족애'같은 이데올로기들은 이 삼각 구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이 삼각구도는 공교롭게도 법-정치-욕망의 삼각 구도와 유사하다. 욕망의 조절을 위해서는 법이 필요하듯이 성적 욕망의 조절을 위해 각종 이데올로기를 통한 결혼의 유지가 필요했다. 사랑과 정치는 독자적 영역이기도 하면서 이 둘(욕망과 법, 결혼과 섹스) 사이를 매개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 이 삼각 구도는 더 이상 유기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결혼은 기피되고 유명무실화되고 있고(오늘날 법의 처지를 생각해보자), 섹스는 위에서 말했듯이 사랑과 결혼과 분리되어 추구되고 있다(오늘날 자본화와 결탁한 넘쳐나는 욕망을 생각해보자). 여전히 일부일처제, 연애결혼, 가족주의 같은 기존의 규칙들은 문화적으로 강하게 남아있지만 그 내실 측면에서 부실해지고 있다. 오늘날 결혼과 성적 욕망은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준다. 불륜을 생각해보자, 과연 결혼이 없다면 불륜은 그렇게 큰 매력을 가질 수 있을까? 껍데기만 남은 법과 법을 위반하고자 하는 욕망이 그렇듯이.
법=결혼을 좀 더 폭 넓게, 사회적 규제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한국사회는 여전히 성 엄숙주의가 엄격하게 유지되고 있다. 대놓고 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여전히 부끄러운 일이다. 한편으로, 엄숙주의 아래는 넘쳐흐르는 성적 욕망이 있다. 세계적인 규모의 '성산업'과 성인 남성 2인 중 1인이 1회 이상 경험해봤다는 성구매, 규제를 교묘히 피하는 포르노 사이트들, 소라넷 같은 범죄적 사이트들이 넘쳐난다. '사회생활'이 룸살롱으로 이루어지는 나라 아니던가. 물론 여기에는 젠더 차가 있다. 여전히 여성의 욕망은 남성의 욕망보다 억압되며, 성적 자유라는 이름 아래 여성에 대한 성착취들(성적 대상화, 성폭력)이 이루어진다. 성해방의 탈을 쓴 적나라한 남성의 욕망은 여성을 자신들의 욕망 아래 종속시키고 비인간으로 만들고자한다(물론 '남성'자체를 위협하는 동성애적 욕망은 바로 배제된다). 이를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소위 '섹스로봇' 개념이다. 황색언론이나 싸구려 SF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것은 최근 상용화단계로 접어들었다는데, 만일 성적 욕망이 추구하는 것이 성적 쾌락이라면 전기자극이나 약물이야말로 훨씬 성적 쾌락을 주지 않겠는가? 섹스로봇은 여성에서 인간을 지워버린, 남성의 성적 욕망 아래 완전히 종속된 비인간의 육체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유명무실해진 법(결혼)과 노골적인 욕망(섹스) 사이에는 자본이 스며든다. 넘쳐나는 자기계발서스러운 사랑담론들, 성산업들, 데이팅어플, 연애지상주의적인 미디어들(가령, 요새 군대에서 핫한 '하트시그널')은 사랑의 자리를 차지한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 앞에서 법-욕망의 사이에서 진자처럼 흔들리거나, 나르시시즘적 사랑에 빠지는 수 밖에 없어보인다. 사랑=정치는 자본화에 이름과 역할을 넘겨버린다. 사랑=정치가 담고 있던 관계성, 타자성, 복잡함, 무의미함 같은 것들은 효율을 앞세운 자본화 앞에 사라져간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나 말초적 욕망을 채우는 데에는 누군가를 깊게 알 필요가 없다. 오늘날의 냉소적이고 배타적인 주체들은 이런 사랑의 처지와 관계가 있다.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랑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법과 사랑, 욕망의 관계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욕망 때문에 인간이 죄를 짓는다는 것도, 그러나 율법은 욕망과 도착적 관계를 갖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의 해법은 말하자면 '변증법적 사랑'이었다.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로마서) 13장을 보자.
"간음해서는 안된다, 살인해서는 안된다, 도둑질해서는 안된다, 탐내서는 안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중략)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가톨릭 번역)
법과 욕망 사이의 관계를 무너뜨리면서 완성시키는 바울의 변증법적 사랑은 오늘날 새로운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데 유효할 것이다. 한편, 이 구절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즉 이웃을 자신만큼, 나를 내 이웃만큼 사랑할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나르시시즘적 사랑을 차단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오늘날 기독교도들이 이런 사랑을 실천하고 있어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이런 사랑 개념을 가져다 쓴다면 그만큼 그런 사랑 개념이 어떻게 지금의 기독교를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한다. 결국 바울의 사랑도 일종의 보편적 사랑이며, 추상적이다. 필요한 것은 구체성 속에 구현된 보편성으로서의 사랑이다.
지금까지 오늘날의 사랑의 처지와 미래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을 했지만, 필자는 여전히 사방에서 들려오는 사랑찬가가 의심스럽다. 평화, 자유, 평등 같이 보편적이지만 공허한 가치들처럼 사랑 역시 그런 '꽃노래'가 아닌가 싶다.
-사랑은 폭력적이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할 때 느끼는 공포에 대해 말한다. A가 사랑하는 B는 B본인은 모르는 B라는 것, 그것이 공포라는 것이다.
-사랑은 미지의 개념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의 무엇이 좋냐고 물어봐도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사랑의 관계에서 착각하고, 폭력을 저지른다.
-사랑은 경제적 교환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상호적이지 않고 계량 불가능하다. 그래서 질투와 의심, 폭력이 그림자처럼 따라오게 된다.
-사랑의 불안정성은 결국 관습과 법을 제정하려는 욕망을 만들어낸다.
-한편으로 그 불안정함과 알 수 없는 요소들은 사랑의 신성화를 낳는다. 이는 사랑의 관계적 성격, 정치적 성격을 지워버리고 사랑을 추상적 영역으로 몰아넣는다.
그럼에도 사랑은 여전히 가장 가까운, 친밀한 개념이다. 철학자 스레츠코 호르바트는 『사랑의 급진성』에서 현대의 '차가운 친밀성'에 맞서 사랑을 재발명하자고 제안한다. 사랑찬가를 불러대는 사람들은 사랑을 하면 세상이 달라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는 이를 뒤집어야한다. 세상을 달라지게 하기 위해 '사랑'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