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글쓰기

'미투'라는 공포

비내리는날 2018. 3. 21. 15:51

어떤 공포가 남성들 사이를 배회하고 있다. '미투'라는 공포가. 사회의 곳곳에서 지금까지 이루어졌던 성폭력들이 고발되고 있고, 성폭력 뿐만 아니라 다른 위계를 이용한 악습들에 대한 고발도 계속되고 있다. 남성사회는 말 그대로 패닉이다. 대부분의 반응은 정치공작이다, 부터 꽃뱀이 있을 것이다, 저게 무슨 (성)폭력이냐 등등 만연한 성폭력이라는 사태의 핵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협소했던 성폭력의 개념이 확대되면서, 나도 범죄자로 몰리는 것 아니냐는 식의 공포가 남성들 사이에 퍼지고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나 댓글로 나타나는 남성들의 미투 비난, 페미니즘에 대한 히스테릭한 반응도 그런 공포를 기반으로 한다.


 그들이 페미니즘을 과격하다고 하는 것에 대해, 페미니스트들은 거의(어쩌면 전혀) 폭력을 쓰지 않았다고 변명하는 것은 맞는 말이긴 하지만 핀트가 어긋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과격하다고 느끼는 부분은 미투가, 페미니즘이 그들을 가해자, 혹은 가해동조자로 만드는 윤리적인 공포 때문이다. 성폭력을 저질렀던 당사자들의 자살 역시 부끄러움과 공포의 중간지점에 있는 그런 감각 때문이다. 남성들은 '폭력은 안된다'는 우리 시대의 사회적 합의를 기반으로 그런 공포를 주는 것을 폭력, 과격으로 낙인찍고 비난한다. 어떤 운동이나 이념도 그것을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것은 오늘날 광신으로 분류된다. 가해자들의 자살이나 아주 흔치 않은 '무고'의 사례는 그런 폭력의 대표적인 예시가 된다.


 똑같이 폭력을 금기시하는 오늘날의 리버럴들의 전략은 세련화다. 이들은 자신들의 적을 뒤쳐지는 사람들로, 자신들을 세련된 사람들로 만들어 헤게모니를 잡으려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서구에서도, 한국에서도 그 '적'들이 자신의 뒤쳐짐, '구림'을 긍정하고 오히려 스스로를 시대의 피해자로 묘사하는 '루저' 전략으로 나오며 원한(Ressentiment)을 기반으로 뭉치면서 한계를 드러냈다. 리버럴의 공허한 헤게모니는 오히려 그 적들에게 성평등은 이미 이루어졌고 자신들이 역차별을 받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로베스피에르는 "덕이 없는 공포는 재난을 부르고 공포가 없는 덕은 무력하다"고 말했다. 리버럴들의 공허한 헤게모니는 세련되었을지는 몰라도 무력하다. 그렇다고 우리는 로베스피에르가 했던 실패를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 지젝에 따르면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는 그 자체로 체제를 바꿀 수 없다는 무능력을 가리려는 히스테리적 반응이다. 그러나 지금 진행 중인 미투운동은 남성들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것 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 자체를 바꿔나가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공포를 단지 폭력이 아니라 사회를 재구성하는 혁명적 공포로서 옹호해야한다. 또한 우리는 혁명적 공포의 자극성에 주목하기보다는, 고발 이전에는 비가시적이었던 다른 공포를,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겪었지만 결코 제대로 묘사되고 전달되지 못했던 공포에 주목해야한다. 


마지막으로, 여전히 '억울한 희생자'들이 있다며 징징대는 사람들에게 로베스피에르의 말을 전하고 싶다.

 더욱 애처로운 재난을 위한 눈물을 남겨둡시다.(중략) 반자유 세력만을 두고 슬퍼하는 사람은 의심스럽습니다. 제 얼굴에 피투성이가 된 폭군의 옷을 흔들어대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로마에 족쇄를 채우고 싶어하는 걸로 믿겠습니다. - 로베스피에르, 1792년 11월 5일 국민공회 연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