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3회차, 계엄 1회차의 조금 늦은 후기
*솔직히 탄핵 1회차는 기억 안남
#1 선포 직전
계엄으로부터 1-2시간 전 무신사 블프로 산 옷이 맞지 않는 것 같아 반품을 고민하고 있었다. 일단 얼추 맞는 것 같은 바지는 세탁소에 수선을 맡겼다. 짧은 다리의 비극. 그리고 일찍 잘까했는데, 12시에 풀리는 무신사 장바구니 쿠폰을 받아야해서 깨어있었다. 그러다 집에서 전화가 왔다. 윤석열이 지금 ‘테레비’에 나와서 계엄을 선포하고 있으니 절대 바깥에 나가지 말라고.
#2 계엄 선표 인지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베란다에 나가 창문 밖을 확인했다. 통상 계엄은 예비검속이 있을테니 경찰로 보이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어찌되든 며칠 집에 못올 것 같아 일단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러다 친분이 있는 한 기자분께 전화가 왔다. 지금 잡히면 빼박 구속이니, 무조건 나서지 말라고(뭐라고 답했는지는 비밀). 여하간 짐을 싸면서 믿을만한 친구에게 집주소와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내가 연락이 안되면 집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몇몇 친구-동지와 통화를 했다. 아 그리고 외국에 나가있는 동지에게 귀국하지 말라고 했다.
(이 행동들은 이제와서 보면 자의식 과잉에 코메디이지만, 솔직히 좀 쫄린건 사실이고, 그래도 한 50차 체포 명단에는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2시간짜리 계엄이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3 국회로 이동
무거운 가방을 둘러메고 어렵게 택시를 잡아 국회로 갔다. 가는 택시 안에서 길을 보니 탱크도 없고, 경찰도 없어서 ‘내가 오바했구나’를 인지하기 시작했다. 택시 안에서 우원식 의장의 느린 진행에 짜증을 내며 여의도 넘어가는 다리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날 군에도 싸이카부대가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4 그 이후
여기서부터는 뻔한 스토리. 무거운 가방에 후회했다. 그리고 당일 헌장에서 데이터가 잘 안터졌다. 통상 2만은 되어야 끊기는데, 왜지?
#5 계엄과 탄핵, 그 사이에서
일단 계엄 이후 하루종일 뉴스 도파민이 터져 약간의 식욕을 상실했다. 덕분에 계엄 내지 탄핵 다이어트에 성공했다.
그리고 여기서 증요한 일이 하나 벌어지는데 이른바 ‘위헌적 계엄에 따른 바지 이벌 수선 사실 망각 건’이다. 세탁소 할아버지가 옷을 다음날 오전에 찾으러 오라고 했느나, 나는 12월 9일이 되어서야 분리수거를 정리하며 바지를 망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늦어졌으면 최소 보관료, 심하면 폐기까지 갈 수있는 상황으로 윤석열에게 손배를 청구할 뻔했다.
추가로 많은 사람들이 그랬겠지만 탄핵 전까지 한시간정도 더 깨어있다 자야하는지 매일 고민했다.
#6 아빠의 기억
잘 이야기는 안해주지만 아빠는 80년 광주항쟁 당시 전주에서 고등학생이었다(518 최초 희생자는 전북대학교 학생이었다). 그래서인지 평소에는 별말이 없던 사람이 “그때처럼 되면 큰일이 나니 빨리 그만두고 집에 내려오라”, “한동안 목소리 크던 친구들이 다 사라졌다.”며 난리를 부렸다. 나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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