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싫으면 왜 도망치지 않아?" 혹은 "왜 거부하지 않아?" 주변에 불평불만이 많은 군인을 볼 때 누구나 한번 쯤 들 수 있는 의문이다. 한국사회와 군대문화에 대해 전혀 모르는 외국인들이 군대가 이러이러한 곳인데 가야만한다고 말해준다면 그들은 십중팔구 도망칠 것이다. 좀 더 거리를 두고 보면, 군대에 대한 집단적인 거부는 제법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저항은 적어도 제도 개선이라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갇혀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다른 상황이지만,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을 전후 세대의 아이들에게 전하는 것의 어려움을 얘기했다. 아이들은 '친절하게도' 수용소에서 계획을 세워서 전력을 끊고 도망가면 된다며 만일 같은 경우에 빠질 경우 꼭 그렇게 하라고 조언했다. 분명히 거리를 두고 보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는 당시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이 가졌던 감정에 대한 공감을 결여하고 있다. 가능할지 모르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현실 사이의 간극, 거기에 질문에 대한 답이 있는게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병역거부자와 기피자를 비난하고 여성과 장애인에게 원망을 하는 까닭도 그 간극 때문이 아닌가. 그러고 싶고 그럴 수 있어보이지만 그럴 수 없다는 현실 속에는 국가에 대한 공포와 무력감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작동시키는 어떤 '부정적 상상력'이 있다. 한번 상상해보자.
우리가 군대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 소집장이 날아올 것이고, 계속 버티면 병역법에 의해 구속되고 십중팔구 유죄 판결을 받을 것이다. 내 주변을 비롯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나를 비난할 것이고 동정은 받을지언정 이해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탈영은 어떨까. 바로 헌병대에서 수사에 착수하고 사복헌병들이 내 주변을 샅샅이 찾아 오랫동안 숨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 상상력의 산물은 상상임과 동시에 현실이다. 실제로 그렇게 되는 사람이 극소수일지라도, 도주에 성공한 사람이 있을지라도 이러한 상상은 어떤 현실보다도 현실적으로 보인다.
부정적 상상력의 힘 앞에서, 모든 불평불만은 이미 '저항불가능'이라는 마크가 찍혀서 나오므로 저항의 계기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만연한 저항없는 불만들은 상상 속의 국가의 그림자로서 그 힘을부풀린다. 불만이 불만의 대상을 지탱하고 강화하는 순환고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의 극복을 위해서는 '저항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불신과 부정을 넘어서서 거부와 도주 이후의 가능성을 희미하게라도 보여줄 수 있는 상상력 말이다. 그러한 상상력은 아직 희미하고, 현실로서 다가오지 못하지만, 이런 답답한 순환고리를 깨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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