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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글쓰기

일본 제국주의의 후예와의 싸움은 시작되었는가?

by 비내리는날 2019. 7. 21.

 일제강점기 강제징용노동자 문제에 대해 대법원의 판결이 피해자측의 승소로 끝나고, 일본 기업 측의 한국 자산 매각 명령 신청이 받아들여지면서 얼마 전부터 일본은 한국에 포토레지스트, 에칭가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반도체에 들어가는 핵심소재에 대한 수출 규제에 들어갔다. 명백한 경제보복이며, 한국 사법부 결정에 대해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압력을 넣는 내정간섭 행위임이 분명하다. 일부 자칭 '현실주의자'와 '탈민족주의자'들은 이 사건이 한국 정부의 지나친 민족주의 감성과 양보없는 태도 때문에 악화된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문제의 본질은 과거 조선에서 강제징용된 노동자의 권리에 관한 문제이고 일본제국주의 청산에 관한 문제이다. 또한 일본 측에 있어서는 자국의 내셔널리즘을 자극해 선거에 유리하게 이용하고자 함과 '반일(?)' 정부 문재인 정권에 대한 길들이기의 일환이기도 하다.

 

 그래서 최근 한국의 온·오프라인 상에서는 일본기업의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 일본 관광 취소 등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 대사관 앞에서 일본 정부 규탄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반면에 극우 야당과 극우지를 중심으로는 한국책임론이 제기되고 한국 정부의 태도가 비현실적, 비합리적이며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외교라인들이 교체되어야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한편, 기업과 경제계는 그런 입장과는 거리를 둔 채로 핵심소재 수출규제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해야한다, 정부와 발맞춰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입장이건 간에 지금 한국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고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한국 기업들이다. 정부는 그들을 달래기 위해 여러가지 외교적 해법과는 별개로 52시간 노동 예외를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 그들이 피해자인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배와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쟁 속에서 강제징용, 징병, 성노예로 끌려간 일이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은 1965년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일본과의 국교정상화에 서두르면서 헐값에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을 받아내, 국토 개발에 전용하였다. 실제로 차관 중 일부는 현금이 아니라 일본 기업으로부터 현물로 받아냈고, 차관된 돈으로 지어진 것 중 하나인 서울지하철은 미쓰비시, 미쓰이 등 일본 전범기업으로부터 납품을 받았다. 나머지 돈으로 실행된 사업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경부고속도로, 소양강댐, 포항제철 등이었다. 소양강댐은 현대건설이 맡아서 짓게 되었고, 경부고속도로는 공병대와 함께 현대건설을 필두로 대림산업·동아건설·삼부토건·극동건설·삼환기업 등 16개 업체가 참여했다. 포항제철은 오늘날의 포스코이다. 즉, 이 때를 시작으로 산업화 과정에서 가장 큰 이익을 챙긴 것은 한국의 기업들이고, 일본 기업들 역시 여기에 참여해 이득을 보았던 것이다. 양국에서 가장 피해를 입는다는 동정을 사는 두 집단이야말로 이 사태의 가장 큰 책임자들인 셈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 정부의 추태와 일본 기업들의 뻔뻔함에 분노하고 있다. 당연하다. 강제로 끌려서 수년 간 강제노역을 하고도 정당한 댓가를 받기는커녕 목숨을 잃거나 간신히 목숨만 건진 채 빈손으로 돌아온 수 많은 노동자들의 피 위에 서있는 자들에 어떻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편으로, 강제징용노동자들을 '구 한반도 출신 노동자'라고 부르며 그들이 '자발적' 노동을 했다고 떠드는 일본 정치가들과 기업인들을 보면서, 장시간의 노동시간과 끔찍한 노동조건에 놓인 불안정 저임금 노동자들을 보고 '자발적'으로 일하는 것인데 무엇이 문제냐는 식으로 대하는 한국의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이 겹쳐보이지 않는가. 실제로 65년 협상을 이뤄낸 군인, 관료, 엘리트들은 일본제국 밑에서 성실하게 훈련받은 이들이었고, 이들과 함께 성장한 기업인들은 전후 모습을 세탁한 일본 기업으로부터 '노하우'를 전수받은 사람들이었다.

 

 조선의 노동자들을 핍박한 일본제국주의와 기업들, 한 줌 돈에 식민지 피해자들의 피를 팔고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노동자들을 몰아넣은 군사독재정부와 기업들, 그리고 지금, 여전히 52시간도 짧다며, 노동자가 기계에 빨려들어가 죽어도 씻어내고 작업을 강행하는 신자유주의적 기업들과 정부는 얼마나 다른가! 일본 제국주의의 후예와의 싸움은 시작되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싸움은 국가 일본, 일본 기업과의 싸움일 뿐만 아니라 우리 내부의 후예들, 우리의 사고방식, 삶의 양식, 바로 우리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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