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에서 정치로
'나를 계몽시키려 들지 마라'
오늘날 많은 이들이 새로운 사회적 변화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위의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주호민 작가가 자신의 트위치 방송에서도 언급했듯이, 많은 이들이 '도덕적 우월감'에 사로잡힌 이들의 상대를 '미개'하다고 규정하는 '계몽'적 태도에 분개함을 느끼는 듯 하다. 이러한 현상은 보편적이다. 페미니즘에 대해 나를 가르치려 들지 말라는 많은 청년 남성들의 불만을 우리는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사실 계몽에 대한 비판은 이런 방향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탈식민주의자들은 비서구에 대한 서구 지성의 계몽적 태도가 갖는 폭력성을 비판해왔다. 계몽에 대한 다양한 비판과는 별개로, 탈이데올로기화된 현대의 냉소적인 사회는 '반계몽'이랄만한 태도의 토양이 되었다. 이데올로기적 기준점을 잃은 현실 속에서는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아니라 속이는 자와 속는 자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상식적인 태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계몽 없이 새로운 가치관의 제시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계몽 없는 설득을 우리는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바로 '상품의 논리'다. 가치관은 하나의 상품이며 이것을 통해 당신을 치장시켜줄 수 있고, 이것이 더 양질의 상품이며, 이것이 당신을 더욱 매력적이고 도덕적이게 보여줄 것이다, 라는 논리 말이다. 각종 도덕적 언사들, 도서들, 굿즈들, 후원 등이 이것이 물질적으로 외화된 형태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지 치장에 불과하고 대항하는 가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표면 위에 보기 좋은 물건들로 덮어씌운 것일 뿐이다. 상품의 논리 위에서 도덕적 가치들은 병존하는 상품들의 다발이지 실천적인 삶의 지침일 수 없다. 이는 냉소주의라는 동전의 앞뒷면을 이룰 뿐이다.
계몽이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보는 수직적인 태도라면, 새로운 가치관을 수평적으로 부딪힐 수는 없을까? 요컨대 서로 용납할 수 없는 두 가치를 충돌시키는 것이다. 두 가치 사이에는 적대가 형성되고, 우열을 가리고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서 다양한 전략들이 동원된다. 설득, 강요, 토론, 통속화 등등. 통약 불가능하던 두 가치 사이에 고차원적인 이론적 적대부터 저차원의 (두 가치가 혼재된)통속적 이해까지 등장한다. 나는 이러한 변증법적 과정을 정치라고 지칭하려고 한다. 정치는 계몽처럼 어느 한 가치의 우월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상대의 가치를 무지로 여기기보다 완전히 다른 가치체계로 여긴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것은 지와 무지의 대결이 아니라 한 가지 지가 다른 지에 도전하는 것에 가깝다. 동시에 정치는 뒤에 오는 가치나 병존하는 다른 가치 체계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열려있다. 이러한 방법 아래서 한 가지 가치의 우월성은 잠정적이고 잠재적 가치들에 개방적이다.
나는 계몽 자체를 폐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정치적 방법을 통해서도 결국은 어느 한 가지 가치의 우선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 도덕체계는 작동할 수 없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은 것은 삶의 지침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것이 옳은지 알기 위해 기꺼이 충돌해야 하고 적대를 받아들여야 한다. 계몽은 그 과정에 존재하는 수 많은 전략 중 일부일 뿐이고, 정치적 과정의 일부로 돌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