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글쓰기

회귀하는 48년 - 좌우익의 '정통론' 비판

비내리는날 2020. 9. 1. 03:39

 1948년은 한국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기점이다. 5.10 총선거를 통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확정되었고 남한만의 단독정부인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었다. 북한에서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한편 남한에서는 2.7 구국투쟁, 4.3항쟁, 여순항쟁을 통해 단독정부수립과 정부 방침에 반대하는 산발적인 항쟁이 있었고 이에 대한 폭력적인 진압이 이루어졌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개전하기 이전에 이미 제주와 전남에서 수 만명의 인명이 살상되었다. 북한에서는 정부수립 이전 이미 토지개혁과 종교탄압, 우익탄압으로 많은 이들이 남한으로 이주해왔다. 48년 체제의 탄생은 남북 양쪽에 좌우익 극단의 정치가 자리잡도록 했으며 아주 오랜 기간동안(북한의 경우는 여전히) 정치적, 사상적 자유를 제한했다.

 

 87년 체제의 탄생은 이러한 대립을 어느정도 해소시켰다. 남한에서는 정치적 자유화가 천천히 이루어졌으며, 789노동자 대투쟁을 통해서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이루어졌다. 비록 그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진보정당의 약세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결과적인 실패가 '노동없는 민주주의'라는 또다른 악조건을 낳았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 87년 체제는 박근혜 정권의 몰락과 촛불항쟁, 뒤이은 문재인 정부의 등장으로 새 시기를 맞이하였다. 새 시대는 민주당의 초강세, 남북의 대화, 진보정당의 축소, 극우세력의 정치세력화, 시민사회의 약체화를 조건으로 한다. 그런데 이런 시기, 좌우익의 대표적 지식인들 사이에 갑자기 48년이 귀환하고 있다.

 

 먼저 우익부터 살펴보자. 총선 참패 이후 보수정당은 이승만, 박정희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고 전두환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를 내놓는듯 하다. 그러나 뉴라이트 지식인들은 다르다. 이영훈, 이우연 등은 <반일종족주의> 등을 통해서 48년 건국론을 주장하고 더 내려가 친일과 일본제국주의 지배를 옹호한다. 이들은 지금까지의 진보가 제대로 된 민족주의가 아니라 종족주의였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식민지배와 분단체제로 인한 민족-국가의 분리를 해결하고자 일본제국 식민지 시기부터 반공국가를 일관되게 옹호한다. 이들은 기형적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이라는 체제 자체를 긍정하면서 대한민국 중심의 새로운 국민주의를 꿈꾼다.

 

 뉴라이트 지식인들의 전략은 그 동안 모호하게 남겨져 있던 보수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고자 하는데 있다. 비록 그들이 추종하는 48년의 '건국자'들은 임시정부를 자신들의 정통성의 뿌리로 두었음에도 이들은 그 사실을 무시하고 일제시대와 건국 이후를 연속적으로 취급한다. 이들은 한 손에는 현실주의, 다른 한 손에는 성장만능주의를 들고 있다. 일제의 지배도, 대한민국의 '건국'도, 독재도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었으며, 이들의 지배 아래서 경제적으로 성장했으니 정당하다는 인식이다. 이런 이론이 패배주의, 냉소주의, 저성장의 시대에 어느 정도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좌익은 어떨까. 전통적으로 한국의 좌익은 48년 체제로 탄생한 대한민국에 의구심을 표해왔다. 전통적인 운동권들과 이후의 자주파로 분류되는 이들은 체제의 정통성에 의문을 가지고 북한 체제의 정통성을 상대적으로 고평가했다. 이들이 보기에 대한민국은 청산되지 못한 친일파들과 친미파들이 좌익을 배제하고 수립한 꼭두각시 정부였다. 이러한 평가는 87년 이후 이들이 현실정치에 진출하면서 수정하게 되지만 기본적인 인식은 이어졌다. 좌익 중에서도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들 역시 국가를 파시스트들의 통치기구, 자본의 집행기구로 보았다. 이들 대부분은 자신의 정통성을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찾진 않았지만, 항일운동의 역사를 가진 조선공산당과 사회주의 운동가들을 고평가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소련의 해체,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이 이들의 인식에 찬물을 끼얹었고, 일군의 세력은 직접 현실정치로 뛰어들면서 정통론에 대한 고담준론을 던져버렸다.

 

 여기서 아주 독특한 지적 여정을 가진 인물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바로 주대환이다. 주대환은 87년 전후 인민노련 활동을 했고, 이후 그의 동지 노회찬과 함께 진정추, 민주노동당을 함께했다. 그러나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 이후 다른 길을 선택했다. 사회민주주의 연대, 바른미래당 혁신위원장 등을 맡아 하면서 그는 이승만을 긍정하고 48년 건국론을 지지했다. 그의 인식에서는 이미 46년 소련군정이 토지개혁을 한 시점에서 분단을 피할 수 없었다. 이승만은 현실론을 택한 것이고, 그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는게 그의 주장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은 이승만과 동일시할 수 없고, 토지개혁을 통해 남한은 비교적 평등하면서 자유로운 국가로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개혁은 체제 내 진보였던 조봉암 덕분에 행해질 수 있었다. 우리는 그에게서도 우익들이 가진 무기 중 하나였던 현실주의를 볼 수 있다. 그의 사고에서는 체제는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이며 두 체제 사이의 선택 이외에 어떤 선택지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비슷한 인식을 보여주는 다른 한 인물이 있다. 48년 체제론의 주장자 중 하나이자 진보적 민주주의 연구자인 정치학자 최장집이다. 최장집은 최근 칼럼에서 이승만을 옹호하며 단독정부에 대한 이승만의 결단이 옳았으며 그의 결단 덕분에 최소한 이념적으로는 자유주의적 입헌주의를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북한의 압력 아래서 친일파를 동원함으로써 빠르게 국가를 형성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자유민주주의를 방어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승만은 단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몸소 실천하고 그 스스로가 민주주의의 건설자가 되지는 못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현 정부의 인식을 반일민족주의라고 주장하며 이러한 인식이 미래지향적 관계에 올바르지 못하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은 마치 뉴라이트의 인식을 그대로 빼다 박은 것과 같다.

 

 주대환과 최장집의 인식을 비판하는 것은 쉽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로운 국가, 평등한 국가 대한민국 자체가 48년의 학살, 50년의 학살 없이는 성립할 수 없었으며, 체제의 건전성은 '건국자'들이 약속한 이념 때문이 아니라 그 이념을 쟁취하고자 한 학생, 노동자 등의 다양한 주체들의 노력 덕분에 유지할 수 있었다. 즉, 이들이 주장하는 이승만의 공과 과는 분리할 수 없는 양면이며 체제와 직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가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인민의 생사여탈권을 가지며 죽어야되는 자와 아닌 자를 나눈 과정 자체가 대한민국 주권의 성립 과정 자체이다. 이들은 거기서 대한민국 체제의 장점을 구해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오직 관념적으로만 분리할 수 있을 뿐이다. 이들은 운동권과 좌익들을 도덕주의자로 비난하지만, 자신들 역시 체제 내 진보로써 체제를 옹호하기 위해 공과 과라는 도덕적 분리를 감행할 뿐이다.

 

 현 정부와 민주당은 이러한 난제를 임시정부 법통이라는 관점으로 회피하고 있다. 즉, 비록 정부수립은 이승만과 친일파들에 의해 이루어졌더라도 정부의 법통 자체는 일제에 저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친일청산과 독재타도, 과거사 진상규명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좌익들은 자주파의 경우 과거와 같은 인식을 지니며 통일로 민족단일국가를 수립했을 때 비로소 정통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나머지 좌익들은 이러한 정통론에 대해 거의 사고하지 않는듯 하다. 그러나 이런 정통론적 문제제기는 정치적 위기의 순간 언제나 떠오른다.

 

 체제 내부에서, 국가 내부에서 현실적으로 살아가면서 체제의 정통성을 어떤 방식으로든 옹호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위험한 일이다. 한국 사회에 대한 평가와 직결된 일일 뿐만 아니라 여전히 체제 경쟁에 있는 나라에서 국가의 정통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자칫하면 반역의 오명을 덧쓸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대한민국의 탄생에는 도덕적, 정통성 문제가 있다는 점 역시 '현실적인' 문제이다. 나는 위에 적은 모든 정통론이 각자의 오류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우익들과 주대환, 최장집의 정통론은 학살이 국가 정체성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점을 도외시하고 지나친 현실순응주의에 빠졌다. 민주당은 임시정부라는 환상을 바탕으로 정통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회피하면서 남은 문제들을 해결해야한다는 모순에 빠져있다. 좌익들은 대체로 정통론 자체를 무시하면서 다른 체제를 옹호하거나 체제 내에 자리잡지 못하는 난제에 빠져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국가를 조건으로 인정하면서 그로부터 탈각해나갈 수는 없을까? 나는 과거사 진상규명과 사죄야말로 그러한 작업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적 실천을 통해서 체제의 태생적 한계에서 벗어나는 것, 체제 내부에서부터 외부로 뻗어나가는 것이야말로 하나의 방법이다. 4.19혁명, 광주항쟁, 6월항쟁 같은 사건들이 그런 시도로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과거에 대한 해석을 바꾸고, 체제의 태생적 한계가 낳은 정치적 제약을 해소함으로써 조건 자체를 고쳐나갈 수 있다. 하나의 정통이 아니라 정통성'들', 계속 만들어지고 틈입하는 '이단'적 사건과 가능성들, 테세우스의 배처럼 점점 성격이 바뀌어나가는 축적물로써의 대한민국의 역사에 대해 사고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