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위한 사회주의
기후위기, 환경문제는 이미 우리를 덮쳤다. 30일이 넘는 장마를 통해 우리는 기후변화가 머나먼 문제가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정치권 차원에서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는 것 같지 않다. 정부의 '그린뉴딜'안에는 석탄화력발전소를 짓는다는 계획까지 포함되어있어 오히려 후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심증을 들게한다. 일부 기술만능주의자들, 특히 대표적으로 일론 머스크 같은 경우에는 기술개발을 통해 기후변화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식으로 설명하곤 한다. 특정한 기술들, 탄소포집 같은 경우에는 기후변화를 늦추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연 기술이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을까? 나는 사회의 총체적인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자본에 의한 과잉생산과 거기에 맞춰진 소비욕망, 인간과 자연에 대한 착취를 기반으로 하는 체제를 멈추지 않는 이상 기술은 땜질 이상일 수 없다. 필요한 것은 자연을 위한 사회주의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상품을 무한정 욕망한다. 화폐를 매개로 모든 표현은 구매/불매로 나타난다. 물론 각 상품에 대해서는 한계효용이 존재하지만, 거의 무한히 공급되는 다양한 상품 앞에서 욕망은 무한해 보인다. 그러나 이런 개인의 수요와 사회적 총수요는 다르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기본적 요소들이 사회적 총수요이다. 개인의 총합이 사회가 아니듯이 개인적 수요의 합이 사회적 총수요가 아니다. 사회적 총수요는 사회적 필요를 사회의 구성원들이 합의해낸 것이어야 한다. 1920년대에 벌어졌던 사회주의 계산논쟁은 이에 대한 것이다.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인 미제스와 하이에크는 시장이야말로 가격을 결정하는 최적의 매커니즘이며 경쟁이 가격결정을 위한 정보를 발견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사회주의 경제학자 랑게는 탈관료화된 중앙통제계획이 설정한 가격을 바탕으로 시행착오를 통해 적정가격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논쟁은 소비에트 체제가 붕괴된 현재에 와서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승리인 것 같아보인다. 랑게는 말년에 자신의 논의를 발전시켜 컴퓨터 등을 통한 현대적인 예측 시스템으로 중앙계획을 가능하게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에도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발달한 빅데이터 기술을 통해서 사회주의 계산논쟁의 문제가 되었던 부분을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경제의 핵심은 정치적인 분배에 있다.
사회적 수요에 대한 계산과 분배는 사회 전체 구성원의 토의와 합의를 통해 스스로 이루어져야 한다. 어디에 더 많은 자원을 분배할 것인가, 무엇을 우선시할 것인가는 우리 스스로 정해야 하며 그에 대한 책임도 우리 스스로 나눠야 한다. 가상의 시장매커니즘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 아래 경제를 통제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 자연을 파괴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과잉생산과 각종 낭비, 착취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자연을 위한 길, 사회주의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자기파괴적인 자본이 절대 스스로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화폐를 매개로 한 교환관계가 되어버린다. 자연은 자본의 대상이고 자연을 가공한 생산물들은 상품이 된다. 자본주의의 이런 조건 아래서 자연과 인간의 공존은 불가능해지고 모든 관계가 자본에 종속될 수 밖에 없다. 궁극적으로 자연과 인간이 가지는 다양한 의미와 가치가 일원화되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착취적이고 일면적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자연을 대상이자 소재로 보고 그 이외의 가치는 무시한다. 기술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을 연결시켜주는 하나의 방법들이라고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떻게 연결시키는가이다. 사회주의는 기술을 자본을 재생산시키고 서로가 착취하는 방법이 아닌 서로 파괴적이지 않은 관계로 전환시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