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수제와 나이주의 - 저항과 퇴행 사이에서
익히 알려져있듯이, 군대에서는 입대한 연월일에 따라 기수가 정해지고 같은 부대 내의 거의 대부분의 장병들이 기수 위계서열에 따른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원칙일 뿐이다.(좀 더 공식적인 원칙에 따르면 병사들은 상호존중하며 타 부대 장병과도 '전우님'이라는 호칭을 써야한다) 같은 부대 내에 가족이나 친구가 있을 경우, 혹은 매우 친밀한 관계일 경우, 그 부대 내의 암묵적인 룰이 있을 경우(상병 이상, 병장 이상이라든지) 장병 간 호칭과 말투는 나이에 따를 수 있다. 편의상 이것을 '말놓기'라고 부르자. 이런 '말놓기'를 둘러싼 관계는 복잡하다. 간부들은 대체로 이를 묵인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있어서는 안되는 행위이다. '말놓기'는 엄격한 군대의 위계질서 규율을 위반하는 하나의 의사소통행위로 보인다. 그렇다면 '말놓기'는 장병 간 평등을 확대하고 규율에 저항하는 행위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아보인다. 이것이 암묵적인 룰이기에, 임의적이며 더 큰 평등을 향한 요구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한편으로는 어느 기수까지를 경계선으로 할 것인지를 두고 발생하는 갈등은 기수제와 위계질서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강화한다. 경계선을 정해 '말놓기'를 한 선임은 자신의 '짬'을 기수제의 질서 아래 머무는 후임들에게 과시할 수 있다. '말놓기'는 선후임 간에 아예 다른 의사소통체계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더 강력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암묵적인 이 룰은 억압적인 공식 룰을 거부하면서도 유사한 위계질서를 자율적으로 만들어내면서 차이를 재각인시킨다.
한편으로 정치적 행위나 결사가 불가능한 군대 내에서 '말놓기'를 둘러싼 갈등은 정치적인 영역을 이룬다. 더 많은 평등과 더 낮은 경계선을 요구하는 후임들과 '짬'의 상징으로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선임들 사이의 갈등은 엄격한 공식 룰 하에서는 불가능한 자율적인 유사정치적 영역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일례로서, 필자는 수개월간 8인으로 운영되는 파견부대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거기서 '말놓기'를 두고 벌어진 갈등은 그런 속성을 잘 보여준다. 병장 둘, 상병 셋, 일병 셋으로 운영되던 그곳에서 상병 이상의 다섯명은 서로 말을 놓았고 나머지 일병들은 기수제에 따른 존칭을 사용했다. 이 파견부대의 암묵적인 룰에 따르면 상병을 넘거나, 다시 원래 부대로 복귀하기 전 몇달 간은 서로 말을 놓을 수 있었다. 복귀 전 두달 무렵 일병들은 말놓기를 은근히 요구하고 상병을 막 달았던 두명은 이에 은근히 반대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짬'이 일병들에 비해 더 존중받기를 바랬고 일병들이 '맞먹는 것'에 우려했다. 같은 기수였던 일병 둘은 후임인 다른 일병에게 말을 놓게 하면서 우회적으로 불만을 표출했고 결국 곧 전부 '말놓기'를 하게 되었다.
'말놓기'에는 또 다른 함정이 있다. 구시대적이고 군사주의적인 '짬문화' 기수제에 대항하는 요소로서 또 다른 사회의 위계질서인 나이주의를 끌어들인다는 점이다. '말놓기'는 구시대적 기수제를 상대화하고 비판 가능하게 하는 준거점임과 동시에 나이주의를 끌어들임으로서 나이에 따른 사회적 위계질서를 재강화한다. 이러한 상황은 비단 군대 뿐만 아니라 대학문화에서의 학번제 VS 나이제 구도에서도 나타난다. 사회 전체적으로 위계질서가 발전적으로 해체되는 듯이 보이는 상황에서 억압적 옛 문화와 그에 대립하는 또 다른 옛 문화 중 어떤 것을 선택하든 다시 위계를 강화할 우려가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군대나 대학집단 내에서 소통가능한 범위 내에서 저항하려면(가령, 군대나 대학에서 서로 평등하게 상호존칭을 사용해야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실행한다면, 우리는 선후임, 선후배들과의 관계에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이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전략적으로 해방적일지, 혹은 그 틈새에 다른 대안의 가능성은 없는지 고민해봐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