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광주역사기행을 앞두고
2018년 광주역사기행을 앞두고
나와 광주민중항쟁의 첫 만남은 초등학교 4학년 때이다. 학급문고에 꽂혀있던 『검정고무신과 함께 하는 기영이의 5·18 여행』이라는 만화책을 보게 되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찾아보니 2005년에 5·18 기념재단에서 1만부를 제작하여 전국 초등학교에 무료로 배포한 책이라고 한다. 책의 내용은 검정고무신의 주인공인 기영이와 기철이가 우연히 1980년 5월 광주에 사는 친척집에 머물게 되면서 항쟁을 겪게 되는 것이다.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학생을 위한 만화였음에도 총에 맞는 장면 등에서 묘사가 굉장히 공포스러웠다. 당시에 이 책을 본 후 무서움에 가슴이 계속 뛰어서 그날 하루 종일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였다. 아직까지도 책의 그림들을 상세히 기억하는 것을 보니 매우 충격적인 책이었던 것은 맞는 것 같다. 이 책을 본 이후로 나는 근현대사에 관한 책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그 책은 지금의 나를 만든 중요한 책이기도 하다.
5월이다. 스무살이 된 이후로는 매해 이 시기가 되면 하는 일이 있다. 하나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읽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광주역사기행을 준비하는 것이다. 올해 역시 마찬가지이다. 올해는 5월 18일부터 20일까지 광주에 간다.
지난해에도 비슷한 시기에 광주에 갔다. 작년에 광주에 가면서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은 망월동 구묘역이었다. 백남기 농민이 16년 겨울에 그곳에 안치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5월의 광주와는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그 해에 광주에 간 이유는 백남기 농민의 묘에 참배하기 위해서였다.
2015년 11월 14일은 충격적인 날이었다. 그날 나의 한 친구는 박근혜가 앉아있는 청와대에 가기 위해 싸우다 팔이 부러졌다. 그리고 백남기 농민의 경찰의 물대포를 맞아 쓰러졌다. 그리고 2016년 9월 25일 세상을 떠나셨다. 모든 것은 21세기 서울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경찰은 백남기 농민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으로 부족했는지 시신을 탈취하려는 시도를 벌이기도 했다. 이 해에 나는 나의 친구들과 백남기 농민의 쾌유를 빌기 위해, 살인경찰을 처벌받게 하기 위해, 그리고 후에는 백남기 농민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대학로를 향했었다.
2014~2016년은 패배가 일상이었다.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투쟁에서도, 노동개악을 막아내기 위한 투쟁에서도 박근혜는 너무나도 강하게 사람들을 벼랑으로 몰아세웠다. ‘우리’는 박근혜의 공세를 제대로 받아치지 못했다. 거기에 백남기 농민의 시신까지 경찰에게 탈취당했더라면 끝없는 절망에 빠졌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절망에 빠지지 않기 위해, 백남기 농민를 지켜내기 위해 싸웠다. 다행히도 많은 사람들의 연대 속에서 백남기 농민은 망월동에 그해 11월 망월동 구묘역에 안장되었다. 비록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절망 속에서도 끝까지 투항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백남기 농민의 곁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올해도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읽었다. 지난해 다시 나온 신판은 아직 구매하지 못해서 을씨년스러운 표지의 구판을 읽었다. 올해는 ‘고립’이라는 단어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전두환 등 신군부에 의해 철저하게 고립된 채로 싸우며 느꼈을 감정들이 무겁게 다가왔다.
나 역시도 학교에서, 거리에서 무언가를 말하며 고립감을 느낄 때가 많았다. 다양한 현장에서도 그럴 것이다.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의 이익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외친다고 생각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냉소와 무관심이었다. 비웃거나 공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럴 때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어떻게 보면 별일 아닌 일을 하면서도 이런 고립감을 느끼는데, 그 해 광주에서 싸웠던 사람들은 더 무거운 고립감을 느꼈을 것이다.
책을 다시 읽었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구절은 “무장 대열에 편성된 군중들은 자신들의 싸움이 실제로 외부에 얼마나 알려지고 있는지 모두 궁금하게 여겼으며 나중에 시정이 되기도 했지만 그들은 라디오를 확성기에 크게 틀어놓고 시끄럽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만큼 그들은 무기를 들고 싸우면서도 고립감과 외로움에 시달렸던 것 같다”는 구절이었다. 집에 들어오면 아무도 소리도 나지 않는 집이 너무 적적하여 음악이나 라디오를 크게 틀어 논다. 혼자 살게 된 후로부터의 습관이다. 이것이 외로움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정작 그해 광주의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가 이해한다라고조차 말할 수 없는 고립감과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음에도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 그런 말을 뱉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밖에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노라고 말해야 했을 것이다.
비할바는 되지 못하지만 우리 역시 많은 고립감에 시달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혼자이고, 옳은 말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진지하게 들어주는 이가 하나 없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우리가 말하는 것, 함께 하는 것은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을 지킨 157명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항쟁이 DNA로 남아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 글을 정리할까를 고민하다가 한 이름이 생각났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민군으로 참여한 고등학생 한상균. 2015년 박근혜에 맞선 민주노총 위원장 한상균. 그리고 2018년 지금 감옥에 있는 한상균. 우리는 여전히 광주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내년 5월에는 광주에서 한상균 위원장의 연설이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