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글쓰기

비판적 뉴스 수용에 관하여

YH51 2018. 2. 9. 21:42

비판적 뉴스 수용에 관하여

 

0.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언론이 있다. 언론은 신문, 라디오, TV, 인터넷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존재한다. 이 글에서는 다양한 언론의 형태를 편의상 뉴스(News)라고 말하겠다.

 

1.

 대부분의 사람들은 뉴스를 진실로 간주한다. 흔히들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어보면 많은 경우 대화에서의 주장의 근거로 뉴스에 보도되었음을 말한다. 이것은 비단 정치적 대화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음식이나 상품의 효능에 관하여 말할 때에도 뉴스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뉴스는 많은 것의 근거가 된다. 그렇다면 뉴스는 진실인가? 이 질문을 고민하기 전에 잠깐 해야 할 일은 뉴스가 어떻게 생산되는가이다. 잠깐 뉴스와 관련한 개인적인 경험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다.

 몇 년 전, 학교에서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를 진행한 일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참사와 유가족의 슬픔에 공감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였다. 나는 학내에서 간담회를 진행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더 많은 사람들의 접근성을 위해 학교 강의실을 대여하고자 했다. 하지만 학교 측은 간담회가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강의실 대여를 거부했다. 당시 나는 강의실 대여 거부의 경과와 입장 등을 정리하여 나의 페이스북에 전체공개로 게시하였다. 이는 약간의 공유가 되었다. 몇시간 뒤 페이스북 메시지와 전화 등을 통해 사건에 관한 기자들의 문의가 빗발쳤다. 나는 나름 성의 것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였고, 나의 입장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다음날 하나 둘씩 기사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진보적인 언론으로 분류되는 언론사들은 나의 입장을 나름 잘 설명해주었다. 굳이 나름이라는 말을 붙이는 이유는 내가 원하는 핵심적인 내용보다는 자극적인 내용과 언론사가 원하는 내용 위주의 편집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메이저 언론사라 불리는 큰 언론사들은 나에게 따간 코멘트 대신 학생지원팀장의 멘트를 주로 실었다. 그 내용은 내가 대학생진보정치경제연구회라는 단체의 소속이고, 이 단체는 학교에 등록되지 않은 외부 단체이기 때문에 강의실 대여를 거부하였다는 것이었다. 대여 불가 사유가 나와의 통화와 다른 것은 둘째로 하더라도, 나는 졸지에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단체인 대학생진보정치경제연구회의 소속이 되어버렸다. 세월호 간담회 역시 그 단체가 주최하는 간담회가 되어버렸다. 이 내용은 큰 언론사에서 보도된 만큼 학내에서 사실처럼 여겨졌고, 학내 커뮤니티 등에서 간담회에 관한 여론은 좋지 못했다. 물론 그럼에도 간담회는 학교 밖에서 진행되었지만, 본래 취지인 많은 사람들과 공감해보자는 목표에 비하면 잘 진행되지는 못하였다.

 또 다른 사례는 총장 임용 반대 투쟁 때이다. 이 경우는 다년간의(?) 언론 대응 경험으로 대응이 좋았던 사례이다. 상황은 재단이 대학교의 총장으로 부적격한 인물을 학내 구성원의 동의 없이 총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이에 나와 뜻이 맞는 사람들은 모여서 이 상황에 대처하고자 했다. 대처는 이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해 학내에 민주주의 분향소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자보조차도 허용하지 않는 학교가 분향소 설치를 허가해주지 않을 것은 너무나 뻔하였다. 설치를 한다하더라도 금방 강제로 철거될 상황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 측이 분향소를 철거하지 못하도록 언론을 이용하였다. () 민주적인 총장 임용을 규탄한다는 내용과 분향소를 설치 계획 등을 담은 보도자료를 분향소 설치에 앞서 선제적으로 언론에 배포하였다. 여기에는 구체적으로 언제 어떤 장소에 분향소를 설치할지도 담겨있었다. 꽤 많은 언론사에서 관련한 문의가 왔고, 설치할 때, 그리고 설치 이후에도 많은 기자들이 분향소를 취재했다. 기자에 말에 따르면 학교 측에서는 처음에는 강제 철거를 계획하였다가, 꽤 많은 취재진을 보고 학생들과 분향소 설치를 두고 충돌하는 장면이 언론에 보도될까봐 강체 철거를 하지 않기로 방침을 변경하였다고 한다. 또한 언론을 통한 공론화는 강제 철거를 막은 것 뿐 아니라, 지역신문에 지면으로 관련 기사가 보도되는 등 소기의 성과를 얻었다.

 위 사례를 보듯 뉴스는 누군가의 의도를 통해 만들어진다. 사례와 같은 방식 외에도 뉴스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더욱 다양할 것이다. 그것은 제보자와 기자의 경제적 관계일수도 있고, 정치적 이유일 수 있다.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위의 과정을 보았을 때에 뉴스는 과연 객관적인가? 두 번째 사례에서 나는 뉴스를 나의 의도대로 유도했고,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였다. 작은 학교에서 벌어진 일이 위와 같은데, 더 큰 사회적 사안을 다루는 뉴스의 이면에는 더 다양한 무엇이 있을 것이다. 뉴스는 진실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끔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다. 뉴스와 여론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란 말이다. 나는 학내에서 혹은 다양한 정치적 상황에서 나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활용해왔다. 언론사와 그들과 함께하는 역시 마찬가지이다. 뉴스는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다. 하지만 힘 없는 자는 의도가 있다 하더라도 뉴스를 만들 수 없다. 나는 이 글을 쓰기 며칠 전에도 기자 없는 기자회견에 다녀왔다.

 대부분의 뉴스는 목적이 있다. 중요한 것은 목적에 다가가는 방법이 민주적인가다. 뉴스를 만드는 것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자의 간격이다. 대자본과 노동자의 관계에서 뉴스는 누구의 말을 우선적으로 실어주는가?

 

2.

 그렇다면 우리는 뉴스를 어떻게 수용하여야 할까? 뻔한 말이지만 맥락적 이해가 중요하다. 뉴스가 하나의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주목하여야 한다. 영국의 역사가 E. 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무엇이 역사가 되는가라는 질문에 흔히 사실은 스스로 이야기한다고들 말한다. 이것은 물론 진실이 아니다. 사실은 역사가가 허락할 때에만 이야기를 한다: 어떤 사실에게 발언권을 줄 것이며 그 서열이나 차례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역사가이다라고 말한다. 즉 역사가 되는 것은 있었던 일이 아니라 역사가가 선택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뉴스 역시 마찬가지이다. 있었던 일이 아니라, 뉴스를 만드는 사람이 선택한 것이 뉴스가 된다. 이것은 누군가에 의해 선택되었다는 측면에서 뉴스에 해석이 가미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뉴스를 어떻게 수용하여야할 지에 관한 한 가지의 답은 찾을 수 있다. 뉴스를 만드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의 의도는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E. H. 카는 또한 같은 책에서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에 관한 우리의 그림에 결함이 있는 이유는 주로 수많은 조각들이 우연히 분실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대체로 아테네시의 소수 집단에 의해서 그려진 그림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서술의 특정 계급의 독점화를 비판하는 말이다. 보편적인 뉴스 제작은 이미 누군가에게 독점화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현장에서 함께하며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아야 한다.

 무엇이 사실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사실을 꾸며나가는 이유와 사실을 꾸미는 사람은 존재한다. 현재 우리의 능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에 관한 고민 아닐까싶다. 이것이 맥락적 이해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도조차도 일반적인 우리의 능력으로 버거울 수 있다. 다만 시도 자체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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