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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동 사회의 역사와 정치 - 2

by 비내리는날 2018. 6. 26.

 이집트의 청년 장교 출신의 가말 압델 나세르는 쿠데타와 권력 투쟁을 거쳐 대통령직에 올랐다. 이스라엘 건국의 파급효과로 등장한 나세르 정권은 비동맹주의를 선언하고 인도의 네루, 중국의 저우언라이,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과 함께 비동맹 운동을 창설하여 소련, 미국의 양강에 대항한 소위 제3세계 국가들의 세력화를 천명했다. 나세르는 냉전 양강 사이에서 이득을 취하고자 했는데, 소련제 무기도입을 빌미로 미국이 아스완 댐 건설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자 나세르는 전격적으로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기로 결정한다. 그 동안 수에즈 운하를 사실상 소유해오던 영국과 프랑스는 반발했고 1965년 이스라엘과 손을 잡고 수에즈 운하가 있는 시나이 반도를 공격하며 2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집트 군은 연전연패했지만, 이집트 배후의 소련의 위협과 미국의 비우호적 입장으로 오히려 수에즈 운하를 이집트에 넘길 수 밖에 없었다. 전쟁은 이집트 군의 군사적인 패배였지만, 정치 외교적인 승리로 끝났고 아랍세계는 나세르주의, 아랍민족주의의 승리에 열광했다. 한편, 이집트가 배후로 있던 팔레스타인 게릴라의 습격을 명분으로 참가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점령하고 수백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을 학살하며 이는 이후 수십년간 반복될 비극의 시작이었다.

 나세르는 아랍권의 맹주를 자칭하며 이라크 유전에 대한 영국의 독점권을 공격했고, 알제리에서는 프랑스의 식민 지배에 대항한 알제리민족해방전선(FNL)의 투쟁을 지지하고 지원했다. 국내적으로는 주요 산업시설을 국유화하고 외국계 기업의 재산을 이집트인들 손에 넘겼다. 나세르주의의 이러한 성격은 아직은 군소정당이던 시리아의 바트당운동, 즉 아랍사회주의부흥당 운동의 노선과 유사한 것이었다. 나세르는 더 나아가 범아랍주의를 내세워 아랍인들의 통일된 연합국을 만들고자 했다. 전후 정국이 혼란했던 시리아와 함께 1958년 아랍 연합 공화국을 선포했으며, 1962년에는 예멘 왕국에서 일어난 공화파의 쿠데타를 지원했다. 나세르주의 이론가들은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민족주의 원칙을 내세우는 한편, 다당제, 의회민주주의, 공산주의 등은 거부했다. 이들의 이론은 아랍의 신흥 중산층, 청년장교,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영웅' 나세르의 시도는 60년대부터 내부적으로, 외부적으로 위기를 맞게 되었다. 나세르 정권은 오른쪽으로는 무슬림 형제단의, 왼쪽으로는 공산당의 공격을 받았는데 내부적 단결을 위해 이를 강력히 탄압했다. 아랍 연합 공화국 내에서도 이집트가 시리아에 우위를 차지하며 이집트에서처럼 사회주의 개혁에 나섰으며, 내부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했다. 1961년 시리아에서 인민당의 쿠데타가 발생했고 쿠데타 세력은 연합 탈퇴를 선언하면서 아랍 연합 공화국은 사실상 무의미해졌다.


 시리아에서는 나세르주의에 영향을 받은 바트당이 세력을 키워 1963년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라크에서도 1958년 범아랍주의를 내세운 카심 장군의 쿠데타가 일어났고, 성지 수호를 자랑하는 하심 왕가의 왕과 섭정은 갈가리 찢겨 바그다드 시장에 내걸렸다. 63년 카심 장군이 암살당하고 이라크 바트당의 지지를 받는 아리프 장군이 대통령직에 올랐으나, 나세르주의 파가 아리프 장군의 지지를 받았고, 공산당이 아리프 정권을 반대하면서 다시 내전이 발발했다. 알제리에서는 1962년 FNL주도로 프랑스로부터 독립했다. 나세르의 영향 아래 군인 중심의 아랍 사회주의가 아랍 사회 전반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 나세르는 이스라엘에 복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67년 아직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무력시위를 벌이던 이집트 군은 이를 침략 시도로 본 이스라엘 군에게 기습 선제공격을 당하면서 3차 중동전쟁, 6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선제 기습공격으로 공군력을 전부 잃은 이집트 군은 육상에서도 시나이 반도를 거의 전부 빼앗겼으며, 시리아는 골란고원을, 요르단은 서안지구를 빼앗기면서 완패했다. 나세르는 충격 속에 대통령 직을 사임했다. 물론 다분히 관제성격의 사임반대 시위를 명목으로 복귀했지만, 이 패배로 나세르주의와 범아랍주의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또한, 팔레스타인인들은 완전히 거주지를 잃고 주변국으로 밀려났다. 이 패배로 팔레스타인 주변 아랍 국가들은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직접적 군사행동을 중단하게 되었고, 팔레스타인인들은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해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구성하고 테러를 비롯한 직접행동에 나서게 되었다. 시리아에서는 66년 바트당 내의 군인 세력이 일으킨 쿠데타로 바트당을 창당한 미셸 아플라크가 추방당하고, 전쟁 직후인 1970년 무혈 쿠데타로 하페즈 알 아사드가 권력을 잡으면서 혼란스러운 정국이 종결되고 아사드가 이끄는 바트당 정부가 지속되었다. 이라크에서도 1968년 알 바크르의 바트당 쿠데타가 일어났다. 새 정부에서 2인자를 맡은 사담 후세인은 시리아 중심의 바트당 노선에서 이탈해 이라크 민족주의에 따른 이라크 바트당을 구축하는 한편, 국내적으로는 반대파를 탄압하고 자신과 동일한 티크리트 출신의 수니파들로 국가 고위직을 채워놓았다. 아랍 민족주의 운동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이집트의 나세르주의, 시리아 바트당, 이라크 바트당으로 나뉘었다.


 6일 전쟁의 충격 속에서 재기를 꿈꾸던 나세르는 1970년 급작스러운 심장 질환으로 사망했다. 그 전에 그가 중재한 사건이 요르단의 9월 사건이었다. 6일 전쟁 직후 주변국으로 쏟아져들어간 팔레스타인인들은 요르단에도 다수 있었다. 특히 PLO와 산하 무장단체들도 요르단에 본부를 두고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PFLP) 등이 주로 항공기 납치를 일으켜 동료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 요르단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었고, 요르단의 하심 왕가는 이들을 왕정을 위협할 요소로 생각했다. 또,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이 요르단 내 지역을 장악하자 이스라엘의 공격이 예상되었고 요르단 군대와의 갈등으로 시가전까지 벌어졌다. 결국 70년 9월 요르단 국왕은 계엄을 선포하고 PLO와의 전투에 들어갔다. PLO를 지원하던 시리아는 요르단에 비공식적으로 파병하면서 아랍 국가 간의 전면전이 예상되자 이집트의 나세르가 중재에 들어가 요르단 내의 팔레스타인 단체들은 레바논과 시리아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로써 통일된 반-이스라엘 연합으로서의 아랍 연합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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