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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글쓰기

'진실'의 위기 - 대칭성, 파레시아, 폭로에 대하여

by 비내리는날 2018. 5. 7.

 바야흐로 폭로의 시대다. 각 분야에서 벌어지는 각종 부조리들, 폭력들에 대한 폭로가 쏟아져나온다. 이러한 폭로들은 사회 변화를 일으키고 긍정적인 결말을 맞기도 하나 많은 경우 의심과 비난을 피하기 힘들다. 특히나 폭로 대상이 인정하기를 거부하거나 변명을 일삼는 경우, 우호적 여론은 점차 의심으로 변하고 출처불명의 악의적인 소문이 돌기 마련이다. '진실'을 찾아야한다며 점차 흙탕물 속으로 말려들어가 결국은 진실 따위는 알 수 없다는 냉소주의로 빠져들기 십상이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아보인다. 오늘날 진실은 왜 위기에 빠졌는가? 진실은 구해질 수 있을까?


 근대 사회에서 진실은 더 이상 신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진실은 스스로 걷게 되었는데, 이것은 진실이 단단한 기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회의와 의심 아래 놓여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진실은 어떤 것을 비판적이고 회의적으로 분석하고 탐구하여 얻어지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그러한 진실 자체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각종 철학적, 사회학적, 과학적, 논리학적 방법론으로도 진실은 명확히 잡히지 않았고, '진실' 아래 전쟁과 학살이 벌여졌다. 이데올로기는 몰락했고 회의주의와 냉소주의가 내면 깊숙히 침투했다. 이러한 조건 아래서 진실의 조건이었던 비판성은 대칭성으로 추락했다. 즉, 어떤 사실에는 반드시 그것에 반대하는 주장, 잘못, 비판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로 인해, 그것이 자체적으로 옳든 아니든 반대주장, 비판, 오류, 잘못이 없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닌 것으로 취급받았다. '진실'을 찾기 위한 도구가 진실 그 자체의 조건으로 변한 것이다.


 이런 인식 아래서, 음모론과 반지성주의, 역사수정주의가 자라났다. 어떤 '과학'이든 반드시 반대항이 있어야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자라난 음모론들은 이미 합리적 의심 수준을 넘어섰다. 비단 이론영역에서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외침들(성폭력 폭로, 권리 주장)도 쉽게 비난하고 혐오발언을 쏟아내며 억지주장을 해도 그것을 '비판적'인 하나의 의견으로 제시하곤 한다. '진실'의 위기는 사회의 위기인 셈이다.


 진실은 살아날 수 있을까. 미셸 푸코의 '파레시아' 연구는 그 실마리를 준다. 말년의 미셸 푸코는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에서의 '파레시아(진실말하기)'에 대해 탐구한다. 파레시아는 시기마다 변화되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상대적 약자가 강자에게 진실을 말하는 행위, 진실된 행동과 일관성을 가지고 진실을 말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었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진실말하기는 진실로서 인정받았다. 좋은 통치자의 조건은 약자의 파레시아를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있었다. 한편으로 로마 시대로 넘어가면서 파레시아는 자기 자신을 돌보는 행위이자 타인을 돌보는 행위로 확장되었다.

 파레시아의 진실 개념은 오늘날의 진실 개념에서 볼 때 몇가지 의문점이 들기는 한다. 회의하지 않는 진실은 상상하기 어렵다. 만약 억압적 구조가 사라진다면, 그래서 더 이상 약자는 약자가, 강자는 강자가 아니게 된다면 파레시아가 담지하던 진실도 사라지는가? 만일 그렇다면 권력구조가 진실을 담보하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파레시아는 오늘날 진실의 위기에 놓인 우리에게 생각할 점을 준다. 해시태그 운동, 미투 운동, 각종 폭로, 내부고발들은 대칭성에 의해 위협받는다. 한쪽 얘기만 들어봐서는 되나, 다른 의견도 존중하라는 위협 속에서 진실은 진흙탕에 빠진다. 그러나 그런 폭로들은 단단한 권력의 장을 깨고 나온 것이다. 폭로는 실행되고 난 이후에도 계속 위협받는다. 우리는 이 위협들, 간신히 드러난 진실이 사라져버릴 위험들에서 '진실'이 진실일 가능성을 보아야한다. 또한, 폭로들은, 파레시아가 그렇듯이 다른 피억압자들의 용기를 북돋아주고 자신의 존엄을 회복하는 행위이다. 이미 우리는 하나의 폭로가 다른 폭로로, 한 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번져나가는 것을 보고 있지 않은가. 사실 굳이 고대 그리스-로마 속을 헤집고 들어가지 않아도 우리는 대칭성이 아닌 진실을 우리 역사 속에서 볼 수 있다. 독재정권 치하에서 목숨을 걸고 출판된 지하출판물들, 커튼을 치고 몰래 돌려보던 '진실'의 영상들, 생명을 태워 '진실'을 전하려 한 수많은 열사들이 그런 것 아니던가. 이러한 다른 진실의 가능성과 전통을 돌아봄으로서 진실을 구해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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