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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게잡이 공선> - 무명은 어떻게 노동자가 되었나

by 비내리는날 2020. 1. 20.

고바야시 다키지는 일본의 대표적인 프롤레타리아트 문학자이다. 일본 프롤레타리아트 작가동맹(NARF)의 서기장을 지낸 그는 결국 1933년 일본공산당 지하활동 도중 특별고등경찰에 붙잡혀 고문으로 살해되고 만다. 그런 그가 1929년 『적기(赤旗)』에 발표한 대표작이 바로 <게잡이 공선>이다. 게잡이 공선은 홋카이도 오타루에서 학교를 나온 다키지가 홋카이도에서 출항해 캄차카 일대에서 활동하는 게잡이 공선들의 활동을 취재하고 자료를 수집해서 써낸 소설이다. 한 척에 400~500명이 타는 거대한 공장식 배에는 여러 척의 소형 선박이 달려있어 게를 잡고 가공해 통조림으로 만들어내는 역할을 했다. 당시 이런 공선들에는 공황으로 한계에 몰린 농민들, 땅을 잃은 개척민들이 몰려들었고 자연히 작업환경은 열악했다.



소설의 플롯은 이 공선에서의 비참한 생활상을 묘사하고 그 속에서 노동자들의 분노가 모여 마침내 파업으로 작업감독과 회사에 저항한다는 내용이다. 다키지는 게잡이 공선의 작업 매커니즘과 '똥통'으로 불리는 숙소, 앞이 안보이는 뜨거운 보일러실 등의 장소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어부, 잡부, 선원, 보일러선원, 선장, 의사, 감독 등 배에서 각자 놓인 위치에 따라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역시 실감나게 묘사한다. 가령 '토끼가 뛴다'고 묘사되는 폭풍 파도 속에 작업을 하게 놓인 어부들과 고된 노동으로 죽은 노동자를 수장하는 부분은 현장을 실제로 잘 아는 사람이 기록한 듯한 느낌을 준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다키지가 살아있는 노동자들의 이름을 호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감독이나 죽어버린 동료는 이름이 드러나지만 어부, 잡부, 선원들의 이름은 드러나있지 않다. 그들은 출신(학생 등), 지역, 별명으로 불리지만 이름이 직접 불리지 않는다. 작중 노동자들은 무명인 것이다. 그들은 이름도 없이 각자의 현장에 뿔뿔이 흩어져 일하고 좁은 숙소에서 간신히 잠을 자고 일어나 다시 일을 한다.

작중에서는 애국심도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감독은 노동자들에게 일을 시키면서 이 일이 일본제국을 위한 일이기 때문에 한시도 늦출 수 없으며 중요하다고 말한다. 노동자들은 고된 노동 끝에도 호송하는 구축함 끝에 걸린 일장기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그 일본제국군이 실은 회사와 한통속이며 이들이 벌인 첫 파업을 총칼로 짓밟는 것을 보면서 노동자들은 애국심도 군대도 자신들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첫 파업이 실패로 끝나고, 마침내 결말부에서 파업이 일어난다. 하지만 다키지는 성공한 두 번째 파업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아주 간단하게 넘어간다. 이는 작중의 고통과 고난을 뛰어넘어 노동자로서 각성하는 순간을 독자에게 맡김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실천적 공감을 느끼게 함이 아닐까.



<게잡이 공선> 속의 무명의 인부들은 서로 뿔뿔이 흩어져서 고된 노동에 시달린다. 이들은 각자의 사연을 안고 살아가지만 국가와 자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무명의 잡부일 뿐이다. 그런 그들이 단결하여 노동자로 각성하는 순간, 두려울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다는 것을 다키지는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한다. 그가 이 작품을 쓴지 어언 9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우리는 뿔뿔이 흩어진 채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각자의 현장을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을 한계까지 쥐어짜는 직장, 그것에 눈 감는 국가, 그들을 돕는 공권력이라는 진부하디 진부한 구조는 현재진행형이다. 과연 고바야시 다키지가 21세기에 떨어졌다면 꺼지지 않는 사무실과 공장에 대한 소설을 쓰지 않고 베길 수 있었을까.



Ps. 이 서평은 네이버 블로그에도 게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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